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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 아버지랑 똑같다
장영엽 사진 최성열 2013-07-30

<꽃보다 할배>의 나영석 PD를 만나다

역시 나영석이다. 7월5일 첫 방영을 시작한 tvN의 리얼 버라이어티 <꽃보다 할배>의 2회 방영분을 보고 든 생각이다. 여기엔 뭇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난무하는 벌칙도 없고, 게임도 없고, 상황극도 없다. 단지 배낭을 멘 할아버지 네명이 유럽 이곳저곳을 유랑한다는 설정인데, 거기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복대를 차는 엉뚱함에, 짐이 무거워 바리바리 싸온 장조림을 던져버리는 대담함에 시청자들이 홀딱 빠졌다. 나영석 PD의 표현대로 “리얼 버라이어티의 태양계 저 너머에” 존재하는, 새로운 예능 종족의 탄생이라고 할까. 올해 초 KBS에서 CJ E&M으로 적을 옮긴 나영석 PD는 때로는 눈 밝은 제작자로, 때로는 할배들에게 휘둘리는 난처한 제작진으로 분해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노인 예능’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나영석 PD의 전화가 수시로 울렸다.) 바쁜가보다. =오늘이 다음회 방송 마무리하는 날이라 그렇다. 다른 인터뷰도 몇개 있고.

-<꽃보다 할배>의 여정은 프랑스에서 출발해 스위스에서 끝난다. 도중에 다른 나라도 들렀나. =(선생님들이)프랑스, 스위스에 주로 계셨고, 중간에 스트라스부르라는 국경지대로 잠시 넘어가신다. 거기서 렌터카 타고 어딜 잠깐 가셨다가, 독일로 들어가기도 하신다. 다들 엄청난 분들이다.

-컨셉이 배낭여행이다보니 첫 숙소만 정해져 있고 나머지 여정은 ‘할배’들이 직접 정한다는 설정이다. 제작진이 많이 불안했겠다. =걱정을 정말 많이 했다. 한국이면 얼굴 들이밀고 섭외하면 되는데, 외국에선 그런 게 안 통하니까. 그래서 실제 관광객처럼 보이려고 핸디캠이나 비디오 카메라 같은 관광용 촬영 장비를 많이 가져갔다. 카페에 들어가면 테이블에 카메라 올려놓고 우리도 밥 먹고. 다행히 그 과정이 술술술 넘어갔다. 방송 기술이 좋아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어떻게 시작하게 된 프로그램인가. =올 초에 CJ E&M으로 이직했다. 새 프로그램에 대한 회의를 하다가 해외여행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누가 가면 재밌을까 고민 끝에 차라리 정말 안 어울릴 것 같은 할아버지들이 배낭여행을 가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예전에 <1박2일>을 연출할 때도 할아버지 배우분들을 섭외했었는데 “안 해, 그런 거” 하시더라고. (웃음) 조마조마하며 여쭤봤는데, 이번엔 예상외로 심정적인 동의는 빨랐다. 오히려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그분들의 드라마 출연작이 너무 많아 스 케줄 조정하느라고 뛰어다닌 게 힘들었다.

-<1박2일> 때와 무엇이 달랐기에 섭외를 승낙하신 걸까. =나도 나중에 여쭤봤다. “애들 노는 프로에 나가서 노인네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게 싫었는데, 이건 우리끼리 가는 거잖아”라고 말씀하시더라. 당신들이 주인공이 돼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한 니즈가 있으셨던 거다. 또 한편으로는 그분들끼리 추억을 만들고자 하는 니즈도 강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방송도 방송이지만, 실제로 이 여행이 끝났을 때 선생님들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순재 선생님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 교류하고 친분이 있는 분들을 섭외했다.

-사실 예능 프로그램 대부분의 메인 게스트가 20~40대 남자들이다. <꽃보다 할배>처럼 70~80대 할아버지 배우들이 주축인 프로그램은 전무후무한 것 같다. =보통 리얼 버라이어티에 누굴 섭외했다고 하면 그 사람과 일을 안 해봤어도 대충 성격이 어떤지 알 수 있다. 팬카페만 들어가봐도 알아야 할 건 다 안다. 그런데 이분들(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은 그런 정보가 없다. 드라마 작품 활동만 하시지 일상의 모습이 어떤지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더라. 무조건 만나서 얘기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촬영 들어가기 전에 수차례 선생님들과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그러면서 아, 노인이란 이런 종류의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웃음) 또 이분들은 노인인 동시에 톱스타니까. 이런 여러 가지 특성을 우리도 조금씩 알아가게 됐다.

-그때 느낀 노인이란 인류는 어떤 유형의 사람들인가. =우리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 같았다. 드라마 속에서의 그분들은 말이 되는 대사를 가지고 스토리 안에서 행동하시는 분들이잖나. 그런데 현실 생활에서의 그분들은 한편으로는 스타지만, 한편으로는 영락없는 70대 노인인 거다. 스타로서의 측면은 좀 알겠는데, 노인으로서의 측면은 적응이 잘 안되더라. 뭐라고 해야 할까…. 했던 얘기를 또 하시기도 하고, 본인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말은 아무리 설명해도 듣질 않으신다. (웃음) 처음엔 굉장히 고생했다. 그래도 계속 만나다보니 대략 어떤 메커니즘으로 소통을 하시는구나 알게 되고, 어떻게 보면 시청자에겐 그런 모습이 재미있게 비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노인이란 존재는 늘 청춘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가슴 저밀 정도로 그리워하시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지금 생활을 받아들일 줄도 아신다. 옛날엔 우리끼리 정말 많이 놀러다녔는데, 그런 말씀들을 하신다. 그 말인즉 어른이 되어서는 그럴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말이잖나. 20, 30대 시절처럼 네분만 여행 가게 해드린다고 했으니 얼마나 들뜨셨겠나. 이처럼 스타인데 노인이고, 노인인데 청춘을 그리워하는, 여러 감정이 혼재된 애매한 지점에 그분들이 딱 서 계셨다. 희한한 그룹이더라.

-2회분만 방영했는데도 직진 순재, 중재파 신구, 떼쟁이 일섭 등 캐릭터가 명확하게 잡혀 있다. 이건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그분들의 개성인가. =아니, 유럽에 와서 알게 됐다. 내가 떠나기 전에 인터뷰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이순재 선생님이 그렇게 빠른 성격인 줄 몰랐다. 다른 선생님들도 마찬가지다. 나와의 인터뷰는 그야말로 말뿐이었던 거다. (웃음) 많은 분들이 어떻게 그렇게 캐릭터를 명확하게 빨리 잡았냐고 물어보는데, 내 생각은 그렇다. 70~80대가 되면 누구나 자기만의 고집이 있는 것 같다. 젊은 시절 그분들의 성격은 복잡다단했겠지.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필요없는 건 하나씩 떼내잖나. 리얼 버라이어티를 찍을 때도 그렇다. 젊은 친구들을 데리고 찍으면 여러 복잡다단한 성향 중 도드라진 부분을 관찰해서 그걸 비로소 캐릭터로 만드는 건데, <꽃보다 할배>의 선생님들은 그런 것들을 이미 본인 차원에서 소거한 상태로 TV 안으로 들어오신 거다. (웃음) 이순재 선생님께 나중에 우리가 따로 말씀도 드렸다. “선생님, 너무 빨리 가지 마세요.” 그렇게 말해도 안 고쳐진다. 그렇게 70~80년을 살아오셨는데 안 고쳐지는 거다. 속으로는 선생님을 보며 맨날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우리 아버지랑 정말 똑같다. (웃음) 우리 아버지도 가족끼리 어딜 가면 벌써 저만치 먼저 가 계시거든. 다른 분들도 우리 아버지의 이런 측면, 저런 측면을 나눠가지는 느낌이 들었다.

-보통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젊은 게스트들은 자기들끼리 스스로 벌칙을 만들고 게임하며 상황을 만들어가는 측면이 있는데, <꽃보다 할배>의 할아버지 출연진은 그런 게 전혀 없다. 예능 멤버로서의 그분들은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나. =처음에 너무 난감했던 게 이걸 어떻게 방송해야지 싶을 정도로 서로간에 대화가 없었다. 리얼 버라이어티는 계속 던져야 한다. 그래야 무슨 사건이 일어나고, 거기서 오는 리액션이 재밌기도 하고, 그걸 압축해서 붙여서 재미를 만들어나가는 작업인데, 이분들은 하루종일 얘기한 걸 모으고 모아야 겨우 분량이 나올 만큼 말씀을 안 하신다. 어떻게 보면 정말 안 친한 사람들 같다. (웃음) 그런데 침묵 속에서 이뤄지는 묘한 분위기가 있다. 내 개인적인 열흘 여정의 하이라이트는 7일쯤이었다. 박근형 선생님이 드라마 찍으러 먼저 떠나셨다. 스위스 기차역에서 어르신들이 헤어진다. 젊은 멤버들 같았으면 울었을 테지만 이분들은 형 갈게요, 어, 가, 하고 덤덤하게 헤어지더라. 그리고 숙소 들어와서 저녁을 드시는데, 식탁에 앉아서 한마디도 안 하시는 거다. 그러더니 백일섭 선생님이 소주 한잔 딱 드시고, 평소 같았으면 술 더 가져와서 먹자고 하셨을 분이 “나는 오늘 그만 잘래” 하고 일어나시더라. 이순재 선생님은 소파에서 멍하니 TV를 보시다가 혼잣말처럼 “근형이 지금쯤 어디 갔을라나” 하시고. 그때 느낌이 확 오더라. 떠들썩하고 시끄럽지는 않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게 소소하게 보여지는데 가슴을 확 채는 게 있다.

-두 번째 여행지를 대만으로 정했더라. =프랑스, 스위스의 반대편에 위치한 나라인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일본, 중국은 많이들 가는 나라인데 대만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등잔 밑 같은 느낌이라 선택했다.

-<1박2일> <인간의 조건>을 보면 출연자들에게 시련을 주며 시청자를 즐겁게 하는 연출자였는데, <꽃보다 할배>에선 실패한 것 같다. (웃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 연출이건 카메라건 뒷전이고, 그분들이 실제로 앞에 계시고 뭘 달라고 하는데, 거기서 “선생님, 저랑 내기하시죠”라고 말할 수 있는 PD는 대한민국에 한명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웃음) 나도 어느 정도 대응책을 생각해서 갔는데도 실제로 “카메라 치워”, “<물랑루즈> 관람비 제작비로 내줘” 하면 “네!”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라. 선생님들에게 드릴 술을 들고 달려가는 내 모습을 보며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들은 정말 언터처블이다. 불가침의 영역이다. 그게 어떻게 보면 정말 리얼한 모습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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