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옆에 투명인간이 산다. 그들은 슬퍼도 눈물 흘리는 게 아니라고 배우며 자랐다. 싱그러운 인생의 여름 두 페이지를 고스란히 나라에 바쳤지만 모두 하는 걸 가지고 뭘 그리 엄살이냐는 주변의 눈초리에 대수롭지 않은 척 넘어갔다. 나이를 먹고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벌고 바쁜 일상에 치이는 사이 점점 입 여는 법을 잊고 살아갔다. 한 때 남자라고 불렸던 이 슬픈 생물은 그렇게 ‘미스터 셀로판’이 되었다. 오늘도 남자들은 노래한다. “사람들은 날 들여다보고 내 곁을 지나면서도 내가 거기 있다는 걸 모른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상황이 급변했다. 술자리에서 군대 이야기라도 꺼낼라치면 매번 똑같은 소리냐며 진저리치던 사람들이 군대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서먹서먹하던 자녀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그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혼자서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는 그들의 일상에 공감을 보낸다. 급기야 꽃보다 할배가 좋다며 할아버지들의 진상 여행을 축복하는 박수 갈채가 쏟아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모두가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진 않았던 남자들의 이야기. <아빠! 어디가?>에서부터 <진짜 사나이>를 거쳐 <나 혼자 산다>가 <꽃보다 할배>를 예찬하는 TV 예능의 세계. 우리는 왜 이제 와서 새삼스레 남자 이야기에 열광하는가.
지난 1월6일, <아빠! 어디가?>가 첫 방영되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반신반의였다. 이 코너가 한 자릿수 시청률로 연일 바닥을 헤매고 있던 MBC <일밤>의 간판이 되리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6개월 남짓 지난 현재 <아빠! 어디가?>와 <진짜 사나이>는 벌써 7주 연속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주말 예능 부동의 강자로 떠올랐다. <오늘을 즐겨라> <뜨거운 형제들> <단비> <신입사원> <룰루랄라> 등 그동안 수많은 코너의 미진한 반응 끝에 나온 결실이라 더욱 의미있는 성과였다. 이 두 코너를 시작으로 최근 예능 프로그램의 중요한 한축으로 떠오른 것이 다름 아닌 ‘관찰’ 예능이다.
진짜 민낯에 대한 궁금증
그동안 예능 프로그램의 두축은 MC 중심의 토크쇼와 <무한도전> <해피선데이-1박2일>(이하 <1박2일>)로 대표되는 리얼 버라이어티였다. 그러나 8년을 버텨온 <놀러와>의 폐지를 시작으로 심지어 ‘유재석’도 통하지 않는 MC 중심의 토크쇼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간다. 리얼 버라이어티는 여전히 시청자로부터 긍정적인 반향을 이끌어내고 있지 만 <무한도전> 등이 선점하고 있는 시장이 확고한 만큼 후속 프로그램들이 이 포맷을 따라해봤자 아류라는 딱지를 떼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던 와중에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다름 아닌 관찰 예능이다.
기본적으로 관찰 예능은 리얼 버라이어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1박2일>처럼 멤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루 종일 따라다니는 방식은 모두 관찰 예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행을 통한 우정과 의리라는 명확한 컨셉이 있었던 <1박2일>에 비해 후속 프로그램들은 그 소재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해왔던 것이 현실이다. 그러던 와중에 등장한 <아빠! 어디가?>는 그간의 관찰 예능과 몇 가지 중요한 차별을 드러냈다. 그중 핵심은 설정된 예능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아빠! 어디가?>의 김유곤 PD는 이에 대해 “진짜‘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를 보여주고 싶었다. 기존의 예능들이 어떻게 웃길까를 중심에 두고 출발했다면 우리는 어떤 부분에서 공감할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했다.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라는 게 포인트다. 서로 잘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관계, 드라마적인 요소가 있는 긴장감이 필요했는데 강궁 PD가 엄마 없는 여행이란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이후엔 일사천리였다”고 말한다. 전문 예능인에 의해 계산된 캐릭터가 아니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날것의 이야기를 통해 좀더 친밀한 공감대를 형성하려 한 것이다.
<진짜 사나이> 역시 이러한 맥락의 연장에 있다. <아빠! 어디가?>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이후인 4월14일부터 시작한 <진짜 사나이>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관찰 예능의 형식에 군대라는 이색적인 소재를 접목시킨 경우다. <진짜 사나이>의 김민종 PD는 “<일밤> 초기의 착한 예능을 기본으로, 연출의 개입을 최대한 줄이고 관찰을 주요포맷으로 삼는 신선한 소재를 찾다가 군대 이야기에 주목했다. 그간 콩트와 쇼 위주였던 군대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과 달리 세세한 부분까지 리얼하게 보여준다면 남성들에겐 공감을, 여성들에겐 신선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며 <진짜 사나이>의 본질이 새로움을 바탕으로 한 공감임을 강조했다. FM병사 김수로, 긍정왕 류수영, 미워할 수 없는 구멍병사 샘 해밍턴 등의 캐릭터 또한 애초에 설정된 것이 아니라 배우들의 진솔한 경험과 새로운 민낯이 일으킨 화학반응이란 것이 그의 설명이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들에서 배우들의 민낯이 도드라지는 건 그것이 관찰 예능이 주는 리얼함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목적과 수단의 일치랄까.
그렇다면 <아빠! 어디가?>의 아빠와 자녀, <진짜 사나이>의 군대, <나 혼자 산다>의 독거남까지, 관찰에 적합한 하고많은 소재 중에 하필 남자 이야기에 꽂힌 이유는 무엇인가.
남자에 의한, 그러나 여자를 위한
단적으로 말해 이 역시 제작여건과 목적의 일치라고 볼 수 있다. 남자가 예능에서 대세였던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일요일이 좋다-런닝맨>과 <정글의 법칙>처럼 대부분의 예능에서 여성의 역할은 많은 남성들 사이에서 윤활제 역할을 하는 홍일점 정도에 그쳤다. 그것도 그나마 MC 토크쇼일 때 가능했던 거고 리얼 버라이어티에서는 그마저 쉽지 않다. <해피선데이-여걸식스> <무한걸스> 이후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사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하게는 과격한 액션과 혹독한 일정, 체력을 요구하는 리얼 버라이어티의 프로그램 특성상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것이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로 관찰 예능의 경우 자칫 불편할 수 있는 속내까지 모두 공개해야 하는데 여성의 경우 이같은 일상성의 공개가 조심스럽다는 한계가 있다. 그에 반해 남자는 아직 다루지 않은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정확히는 다룰 필요나 관심이 없었던 부분이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남성의 그림자가 예능 환경의 변화와 함께 가장 적합한 소재로 떠오른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원인은 TV 예능의 주시청층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진짜 군대 이야기나 혼자 사는 남자의 일상 등의 소재는 그 자체로 이색적이다. 얼핏 지루하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다큐멘터리와 같은 형식으로 자세히, 그리고 사실적으로 보여줄 경우 대다수 여성에게는 생경한 경험임에 틀림없다. <아빠! 어디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작 아빠와 자녀들간의 스킨십을 보고 싶어 하는 관찰자가 누군지를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김유곤 PD의 말에 따르면 “<아빠! 어디가?>는 육아라는 부분에서 여성들의 호기심을 타깃으로 시작했다”. 이같은 여성 시청자의 영향력에 대해 방송작가협회의 김주영 이사는 “최근 예능에 남자 이야기가 전면에 등장한 것은 다분히 여성의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아빠! 어디가?>는 모든 여성이 바라는 남성의 육아 참여를 충족시켜주는 부분이 있고, <진짜 사나이> 역시 초식남이 넘쳐나는 최근 경향에 대한 반발로 잃어버린 남성성을 전면에 내세운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소비하는 주요 계층은 당연히 여성이고 이는 여성의 사회적 위상이 증대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닐슨코리아가 실시한 한 조사에 따르면 <아빠! 어디가?> <진짜 사나이> <나 혼자 산다>의 주요 시청층은 여성이며, 특히 <나 혼자 산다>의 경우 그 비율이 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으로 집계됐다. 즉 최근 예능에서 소비되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남자이야기이며 이는 어떤 측면에서는 철저히 소비자의 성향에 맞춰진 기획 상품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매체가 여성, 여성의 몸, 여성의 이미지를 소비하던 방식이 그 대상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꽃미남이 있으면 몸 좋은 남자도 보고 싶고 재미있는 남자를 봤으면 다음으로 가정적인 남자의 모습도 보고 싶어진다.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남자들의 그림자, 굳게 다문 속내는 다양한 형태의 남성성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텃밭인 셈이다. EBS 강영숙 PD는 이에 대해 “똑같은 포맷으로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웠다고 해서 이만큼의 성공을 장담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확장된 남자 관찰 예능이 방송가에 늘 필요한 ‘새로움’이란 요소를 적절히 공략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일상의 드라마, 드라마의 일상
새로운 영역을 고민하던 리얼 버라이어티는 주시청층을 공략하기 위해 남자 이야기를 선택했고, 리얼리티와 공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비예능인(남자 배우)들의 다양한 속내를 관찰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는 산업적으로는 하나의 프로그램이 성공하면 그것을 확대, 변주, 재생산하는 방송가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물에 불과하지만 대중매체가 선택한(혹은 잠재적 요인들로 인해 결정된) 방향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여러 가지 사회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남자 관찰 예능에서도 시대정신이 반영된 몇 가지 징후가 발견된다. 우선 주시청층으로 떠오른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다. ‘지금’이기 때문에 이런 형식의 프로그램들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몇년 전 EBS에서 <아빠! 어디가?>와 유사한 포맷의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이 출연했음을 감안하더라도)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것은 단순히 프로그램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를 뒷받침하고 동조해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이를테면 남성의 육아문제에 대한 불만 내지 고민들이 충분히 공유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시대정신이라 해도 좋겠다. 시청자와의 공감은 시대정신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졌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관찰이라는 형식이 지니고 있는 공익성, 그러니까 다큐멘터리적인 양식이 전달하는 교양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대한민국 1인가구 453만명. 이제 혼자 사는 삶은 대세가 되었다”는 <나 혼자 산다>의 오프닝 멘트는 프로그램의 기반이 현실에 있음을 재확인하고 시청자를 설득한다. 다소 밋밋할 수 있는 관찰 예능의 핵심이 공감과 교양적인 효과에 있음을 실감하는 부분이다. 육아문제, 군 비리 문제, 1인 가족 혹은 가족의 해체 등 당대 직면한 사회적 문제의식이 프로그램의 이면에 깔려 있는 셈이다. 일련의 관찰 예능들은 기본적으로 유사 다큐멘터리로서의 소구력을 지니고 있다. 아빠는 육아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진정한 군대는 무엇인지, 1인가구 시대에 잊혀져가는 가족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새삼 환기시킴으로써 작품 속 캐릭터들의 성장에 대한 당위도 설득력을 얻는다. 아들과 소통하는 성동일을 응원하고 싶어지고, 진짜 사나이가 되어가는 관심사병 샘 해밍턴에게 박수를 보내게 되는 성장의 드라마. 예능 속 캐릭터들이 성장하는 것처럼 예능도 성장한다. 수줍은 아버지들에서부터 출발한 남자 이야기는 이제 뭐든지 용서되는 할배들의 좌충우돌 여행기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렇게 일상이 드라마가 되고 드라마를 다시 일상에 녹여내며 대한민국 예능은 오늘도 진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