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어 윌 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 2007)
<펀치 드렁크 러브>(Punch-Drunk Love, 2002)
-어떻게 이렇게 젊은 나이에 거장이 되었나요. =1970년 6월20일생으로, 올해 그는 마흔세살입니다. 1996년 <리노의 도박사>로 젊은 나이에 데뷔했죠. 9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감독들(대런 애로노프스키, 크리스토퍼 놀란 등) 중에서도 단연 빼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남부의 샌페르난도밸리에서 나고 자란 그는 전형적인 아웃사이더 작가입니다. 할리우드의 변방이자 황폐한 도시 근교에서 자란 성장 배경이 아메리칸 드림의 어두운 그림자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유별난 재능의 토양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지독한 영화광이라고 하던데요. =<부기 나이트>를 통해 제2의 타란티노란 칭찬을 들을 만큼 잘 알려진 영화광입니다. <부기 나이트>는 실제로 극장용 포르노를 탐닉했던 그의 경험이 녹아 있기도 하죠. 1970년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주자인 로버트 알트먼, 마틴 스코시즈, 조너선 드미, 시드니 루멧 등이 자신의 영화적 양분이 된 감독들이라고 수차례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일곱살 때 이미 “내 이름은 폴 앤더슨입니다. 나는 작가, 프로듀서 감독, 특수효과 전문가가 되고 싶습니다. 나는 모든 작업을 수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저를 고용하십시오”라고 적힌 노트를 들고 어른들을 찾아다녔다고 하니, 될성부른 나무는 뭐가 달라도 다른가봅니다.
-로버트 알트먼의 적자라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 말인가요. =텍스트 장악력이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 있는 그는 많은 등장인물 사이에서 이야기를 탄력적으로 조정해나가곤 합니다. <매그놀리아>가 대표적인데 스스로 밝히기도 했듯이 ‘앙상블 영화’의 대가로 불리는 로버트 알트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알트먼 감독의 유작 <프레리 홈 컴패니언> 촬영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알트먼의 백업 감독을 자청하기도 했습니다.
-뉴욕대를 자퇴했었다던데요. =강의 하루 만에 실망하고 등록금을 환불받았다고 합니다. 그 돈은 곧장 단편영화 제작에 투자되었죠. 이후 1993년 짐 자무시 감독의 <커피와 담배>의 제목을 패러디한 단편영화 <담배와 커피>를 만들어 선댄스영화제에 초청, 선댄스 영화제작 워크숍에 참여합니다. 이때 그를 가르친 마이클 케이턴 존스 감독은 “재능있고 창의적이지만 경험이 부족하다”는 엄격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인연으로 장편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의 감독까지 맡았으니 인생사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죠.
-여전히 필름을 손으로 편집한다던데 사실인가요. =<마스터>에서 역시 65mm 포맷을 채택한 덕분에 손으로 편집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영화계에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은 다른 누구도 아닌 폴 토머스 앤더슨이다”라고 할 만큼 타협없는 작가정신을 고수하기로도 유명하죠.
-공백기가 긴 감독인데 차기작 <인히런트 바이스>는 언제 만들어지나요. =명성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흥행 실패와 대중적이지 않은 소재 때문인지 영화 사이의 공백이 3∼5년으로 짧지 않은 감독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차기작 <인히런트 바이스>는 2014년 개봉을 목표로 조만간 촬영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워너브러더스가 투자하고 다시 한번 와킨 피닉스와 호흡을 맞출 예정입니다. <마스터>를 제외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모든 영화에 함께한 촬영감독 로버트 웰스윗도 복귀한다니 반가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