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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TVIEW] 오빠와 아저씨 사이

<방송의 적>과 ‘적 같은’ 재미를 만끽하다

<방송의 적>

전람회와 넥스트, 패닉의 팬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거침없이 무대를 장악하던 신해철이나, 대학만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선배처럼 수수하면서도 섬세해 보이던 서동욱에 비해 동글동글한 사촌오빠를 닮은 이적을 더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발매된 패닉의 2집은 특별히 거금을 들여 CD로 샀다. 괴기스런 일러스트와 ‘냄새’, ‘혀’,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 등 끔찍한 환상소설 같은 가사로 빼곡한 부클릿을 뜻도 모른 채 수없이 읽노라면 가슴이 뛰었다. 열일곱살이 느끼기에도 병들어 썩어 있던 세상, 아니 열일곱살이어서 더 추악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던 세상을 향한 이 강렬하고도 문학적인 은유라니, 그야말로 멋이 폭발했다!

그 뒤 십수년이 지난 뒤 대기업의 카드 광고 모델이 되어 “실용의 길을 배웁니다”라며 미소 짓는 이적은 내가 동경했던 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지만, 타인의 삶과 선택에 대해 함부로 해석하고 실망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가 예전보다 조금 재미없는 어른이 된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적어도 재미 면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이상민이 주인공이었던 Mnet <음악의 신>의 제작진이 요즘 만드는 <방송의 적>에서 이적은 정말 진저리치게 웃기는, 혹은 우스운 캐릭터를 연기한다. 서울대를 졸업했고, 데뷔하자마자 스타가 되었으며, 인정받는 싱어송라이터에, 베스트셀러를 낸 소설가이기도 한 이적이지만 <방송의 적>은 이 마흔살 유부남의 한없이 찌질한 속내를 낱낱이 파헤쳐 전시한다. 이상민이 보여준 ‘노는 남자’의 허세가 그의 굴곡진 인생역정으로 인해 코믹하면서도 애잔한 구석이 있었다면, 인생에 음지라곤 없을 것같이 ‘배운 남자’로 살아온 이적의 지적 허세는 다소 불편하기도 하다. 쉽게 말하면, 잘난 사람이 잘난 척하는 게 재수 없어 보인다는 얘기다.

하지만 스스로 “거대 기획사의 막 찍어내는 상품 속에서 소수를 대변하는 누군가가 필요한데 저밖에 없지 않나”라는 자의식 과잉에, 굳이 카프카와 베케트를 언급하면서도 “영어 원서는 중학생 때 읽던 건데 재수 없어 보이니까 치워놔”라며 ‘소탈한 인텔리’를 연기하는 이적 캐릭터의 징글징글함은 소리 없는 비명과 폭소를 함께 부른다. f(x)의 크리스탈, 백진희 등 스무살 가까이 어린 후배들은 물론 유흥업소에서 만난 여성에게까지 숨 쉬듯 작업을 걸면서도 예술적 영감을 줄 ‘뮤즈’를 찾고 있을 뿐이라는 뻔뻔함도 일관성있다. 자신의 이름을 건 <이적 쇼> 첫 녹화에 일부러 늦으면서도 “지각이 아니라 연예계 질서를 위한 것”이라며 꼰대 기질을 발휘하고, 후배인 존 박이 팬들로부터 융숭한 도시락을 대접받자 샘이 나서 ‘조공의 사전적 의미’를 들먹이며 일침을 가하는 모습은 눈물겨울 지경이다. 게다가 소처럼 순한 눈망울로 ‘적이 형’만을 바라보며 따르는 존 박의 바보스러움은 그가 <슈퍼스타K> 시즌2의 왕자님이었던 시절을 싹 잊게 할 만큼 강력한데, 이적-존 박-이적의 제자 응구(선아)의 관계는 종종 <은교>의 이적요-서지우-은교의 삼각관계만큼이나 괴이한 긴장감에 휩싸이곤 한다. 그래서 마치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찜찜하면서도 너무 적나라하고 예리해서 웃어버릴 수밖에 없는 <방송의 적>은 ‘적 같은’ 재미라는 걸 새롭게 만들어냈다. 비록 피아노를 치며 <달팽이>를 부르던 낭만청년은 갔지만, 이 정도면 가까이 하긴 싫어도 멀리서 보기엔 재미있는 아저씨니까 다행↘이다. 물론 이 얘길 들은 이적은 말하겠지. “아저씨라는 말은 너무 낯선데… 영화 <아저씨> 말하는 건가?”

<방송의 적>의 ‘적 같은’ 신 스틸러

심드렁한 태도로 “이적, 요새 아는 사람도 많이 없고 그냥 <무한도전> 나온 아저씨로 아는 거 아냐?”라던 류승완 감독. 자신이 ‘못 나가던’ 시절 얘기는 못 들은 척, “내 입으로 말은 못하지. 최고라는 말”이라는 잘난 척, 영화감독 모임에 끼고 싶어 안달하는 이적의 마음은 모르는 척하는 얄미운 비치(bitch) 연기는 압도적이었다. 그 와중에도 넓은 어깨와 늘씬한 상체를 부각한 터틀넥 스웨터 차림으로 시선까지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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