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필름 임승용 대표를 처음 만난 건 그가 제작한 <방자전>(2010)이 극장에서 내린 직후였다. 당시 그는 시오필름의 대표와 바른손 영화사업부 본부장 자리를 겸하고 있었다. 어떤 내용의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의 책상 위에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던 풍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성격상 인터뷰를 비롯한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까닭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영화산업 관계자들이 많다. 하지만 그를 잘 알든 모르든 많은 사람들은 제작자인 그를 두고 “원작을 고르는 감식안이 뛰어나고, 그걸 상업영화 언어에 맞게 잘 각색해낸다”고 평가한다. <올드보이>(2003),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2003), <홍길동의 후예>(2009), <방자전>(2010), <커플즈>(2011) 등 그가 기획한 영화 대부분이 만화, 소설, 고전을 원작으로 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곧 촬영을 앞두고 있는 신작 <포인트 블랭크>(감독 전재홍)와 현재 시나리오 작업 중인 몇개의 프로젝트 역시 각각 동명의 프랑스영화와 소설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얼마 전 자신의 새로운 제작사 용필름을 상수동에 차리면서 <씨네21>과 이웃사촌이 된 임승용 대표를 다시 만났다.
-얼마 전 용필름을 차리고 상수동으로 이사했다. =사무실 근처의 요가학원을 다닐까 하다가 옆에 붙은 <씨네21> 간판을 보고 그만두기로 했다. (웃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고 하지 않나. 강남에서 십여년 동안 영화를 해서 그런지 동네를 좀 바꾸고 싶었다. 그간 상수동에 자주 오기도 했고, 홍대의 에너지가 좋아서 이곳으로 왔다.
-창립작 <포인트 블랭크>는 7월에 각색고가 나와 8월에 크랭크인한다고 들었다. =PD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옆에 앉은 이준우 프로듀서를 보며) 너도 모르니? 그럼 이 작품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거니? 일단 배우 류승룡, 김성령이 출연한다. 그리고 조여정이 합류했다. 중요한 역할을 할 남자배우는 아직 ‘블랭크’ 단계다. 각본은 나와 <주먹이 운다>를 함께했고, 지금 <명량-회오리바다>(감독 김한민), <군도: 민란의 시대>(감독 윤종빈), <인랑>(감독 김지운)을 작업 중인 전철홍 작가가 썼다. <인랑>을 먼저 끝내고 이걸 진행하느라 각색이 늦어지고 있다. 스탭은 대부분 결정됐다.
-원작이 동명의 프랑스영화다. 각색 과정에서 가장 주안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뭔가. =원작은 복수와 구출을 중심으로 하는 두개의 플롯이 묘하게 붙어 있다. 영화와 연애는 빨라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내 입맛에도 맞았다. 기대했던 캐릭터였던 여성 형사반장이 이야기 도중 죽으면서 보는 사람을 당황시키는 데서 호기심이 동했다. 다만 각색할 때 400m 계주를 하듯이 각 플롯간의 바통 터치가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도입부의 미스터리에서부터 아내가 납치돼 구출되는 이야기가 등장하고, 동생이 죽은 뒤엔 복수로 이어지고, 엔딩에 가서는 모든 사건이 한꺼번에 해결되며 피날레. 원작은 플롯들을 잇는 부분이 좀 헐거웠기 때문에 이음매 봉합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전재홍 감독을 낙점한 이유가 궁금하다. =영화 <풍산개>를 보았는데 초반에 캐릭터를 표현하는 면이 대단히 좋았다. 상업영화 감독은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만의 전공이 있으면 된다. 근래 데뷔한 신인감독 중에 캐릭터를 영화적 인물로 표현하는 건 전재홍 감독이 톱인 것 같다.
-배우들은 어떤 역할을 하나. =킬러로 나오는 류승룡의 이름은 여훈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류승룡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류승룡은 극장에서 이 영화의 원작을 본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영화화 얘기를 듣고 직접 사무실에 찾아왔는데 그때부터 이미 킬러 역을 맡고 싶어 했다. 류승룡에겐 다르게 보려고 하고, 본질을 꿰뚫어볼 줄 아는 눈, 이를테면 사이드킥이 있더라. 김성령은 이 사건을 알게 된 최초의 여자반장 캐릭터다. 납치된 임신부 역할은 조여정이 맡기로 했다. 조여정의 고민은 딱 하나다. 자기가 임신부로 예쁘게 보이겠냐는 것.
-조해진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로기완을 만났다>(이하 <로기완>)도 각색 중이다. =<로기완>은 벨기에에서 난민 신청을 하는 탈북자의 이야기다. 원작을 읽어보니 탈북자만의 얘기가 아니라 사람이 살려고 발버둥치는 얘기 같았다. 원작에선 로기완이 등장하지 않고 로기완이 벨기에에 도착해서 영국으로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극중 인물인 작가가 그대로 밟아가는 설정이다. 각색하면서는 작가의 캐릭터를 없앴다.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과정에서 소설적 접근과 영화적 접근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로기완과 로기완이 만나게 되는 여자를 중심으로 해 좀더 멜로적 접근을 할 생각이다.
-<은교>를 본 뒤 <로기완>을 정지우 감독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은교>를 어떻게 만들지 궁금했는데 장면이 격조있고 영화가 좋았다. 기본적으로 정지우 감독은 균형감이 좋다. 흥행 스코어를 유지하면서도 의미있는 상업영화를 잘 만든다.
-사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 판권도 계약 완료했다. 어떤 점이 촉수를 건드렸나. =근 십년 동안 읽었던 소설 중 가장 큰 반전이 있었다. 쭉 읽다가 두 문장 더 읽었는데 완전히 다른 얘기로 한순간에 변해버렸다. 단순한 반전 플롯이 아니라 스토리와도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서 좋았다. 영국 소설이라 판권 사는 데도 오래 걸렸고, 박찬욱 감독님과도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시 박찬욱 감독과 손을 잡았다. =프로듀서로서 좋은 연출자와 세 작품은 해봐야 하지 않겠나. 마이클 잭슨의 유작 비디오를 보면 고령의 프로듀서 퀸시 존스가 나온다. 그가 무대 위에 멈춰선 마이클 잭슨에게 말한다.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얘기해. 그렇게 해줄게.” 난 한번도 그런 프로듀서가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가 중요했지 감독들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님에게 “내가 최대한 벽이 되어드리겠다. 감독님의 스완송을 한번 만들어보시라”고 말씀드렸다.
-<올드보이> 때는 어땠나. =아이템 기획하고, 시나리오 만들고, 촬영하고, 후반작업 과정과 해외 일정까지 모두 책임지는 총괄프로듀서였다. <올드보이>는 얻은 것도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잃은 것도 많은 영화다. 어렸던 나에게 너무 빨리 찾아온 기회여서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그때 박찬욱 감독님은 내가 무척 꼴보기 싫었다고 하셨다. 물론 나도 감독님이 진짜 싫었지.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동대학원 석사 과정을 밟았다. 영화는 고등학생 때부터 하고 싶어 했다고 들었다. =<주말의 명화> ‘빠’였다. 엄마에게 혼나지 않고 <주말의 명화>를 보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는 척했던 영화소년이었다. 자연스럽게 영화가 하고 싶어졌고, 마침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해서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안 따라갔다. (웃음) 집이 미국이라 방학 때 석달 정도씩 거기 있으면서 USC도서관이나 UCLA 등에서 영화를 많이 봤다. 한길사에서 운영했던 한길영화학교 1년 과정도 밟았다.
-석사 졸업 논문이 ‘소설의 시나리오 각색 연구-<오발탄>을 중심으로’였다. 영화와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우연히 유현목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그게 <오발탄>이었다. 소설 원작과 시나리오가 다르더라. 소설 텍스트를 시나리오로 만들기 위해 어 떻게 영화적인 변용을 거치는지 한 작품을 깊이 연구하며 도움이 많이 됐다.
-졸업 뒤엔 디즈니에 취직했다. 디즈니에는 어떻게 들어갔고, 무슨 일을 했나. =미국 영주권을 과감히 포기하고 군대를 갔는데 일곱 시간 만에 좌절하고, 2년2개월6일을 꽉꽉 눌러 만기 제대했다. 말년휴가 중에 지인과 술을 마시는데 면접 제의를 받아 면접을 봤다. 2년 반 동안 일했던 디즈니에선 개봉작의 시나리오를 볼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 해외 정킷도 가봤고, 상업영화의 최전방에 서 있는 영화를 배급하고, 판권 관리하고, 마케팅하는 여러 툴들을 배울 수 있어서 의미가 있었다. 아침 8시에 시사실에서 직원들이 모여 영화를 보며 이 영화를 할지 말지 회의를 한다. 다들 졸고 있는데 나만 재밌어서 끝까지 다 본 영화가 있다. 사장님이 어떠냐고 묻는데 다들 조느라 기억 못하고, 나만 ‘반전이 무척 좋았다’고 답했다. 그 영화가 <식스 센스>였다.
-디즈니에서 나와 바로 프로듀서로 경력을 시작했다. =가족 중 유일하게 내가 영화하는 걸 지지해주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충격이 컸다. 당시 시나리오작가였던 김대우 감독님이 어느 날 충무로로 부르셨다. 영화하고 싶다는 사람이 왜 숨어 있냐고 꾸짖으셨는데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떨어져서 다치고 구르더라도 그렇게 해봐야 내려가는 길을 아는 건데 위에서 버티고 있으면 결국 모르지 않겠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이서열 대표님이 하던 베어엔터테인먼트에 취직한 뒤 프로듀서 입봉작으로 <휴머니스트>(2001)를 만들었다.
-‘판권 감식안’이 훌륭하다는 평가가 많다. =원안의 포인트를 빠르게 캐치하고, 만들지 안 만들지 결정하는 능력은 훈련해야만 쌓인다. 충무로에서 내가 원안을 갖고 진행하는 걸로 꽤 인정받았다면, 사실은 그만큼 많은 실패를 겪었다는 얘기다. <올드보이>나 <방자전>도 원작을 보고 ‘살짝만 고치면 될 거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지만 막상 덤벼보니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원안이 있는 걸 영화로 푸는 건 지금도 여전히 어렵다.
-사무실 직원들의 말에 따르면, 임승용 대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노하우를 전부 공유해줘서 도움이 많이 된다더라. =조금 멋부려 얘기하자면, 롤렉스가 왜 앞에 서 있는 브랜드겠나. 롤렉스는 좋은 기술을 개발하면 그 기술로 시계를 만들고 그 시계가 대중화되면 기술을 공개해버린다. 그러는 이유는 공개해야 그다음 기술을 만들 것이고 노력할 거잖나. 내가 특별한 영업 비밀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래야 나도 후배들도 전보다 좀더 나은 프로듀서가 되고 전보다 나은 툴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라는 건 아름답게 하는 얘기고, 사실 그거 얘기해주는 게 뭐 어려운 거라고. (웃음)
-그간의 경험들이 제작자 임승용에게 남긴 교훈이 있다면. =어머님이 점 볼 때마다 ‘얘는 사업하면 안된다’는 소릴 들으셨다는데. (웃음) 시오필름을 만든 건 제작부 막내부터 시작하면 의견이 있어도 할 얘기를 못하는 게 너무 싫어서였다. 바른손과 한시적인 동거를 끝낸 이유는 작품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였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 내가 하고 싶은 작품들이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하려면 책임도 내가 져야 하는 거더라. 영화는 한편이 잘됐다고 해서 그다음 영화들도 잘되는 게 아니다. 6년간 빚을 30억원 넘게 만들며 배운 교훈이다.
-이름 마지막 자를 딴 제작사 용필름으로 새로운 출발을 했다. =한자로 용 용(龍)이 아니라 쓸 용(用)을 쓴다. 굳이 따지자면 쓸모있는 영화를 만들자는 건데 사실 세상에 쓸모있는 영화가 어딨나. (웃음) 내 이름이 들어가는 영화사라고 대단한 각오가 있는 건 아니다. <포인트 블랭크>는 그냥 나의 열두 번째 영화이고, 최초로 씨를 뿌렸던 아이템들이 열두 번째, 열세 번째, 열네 번째 영화가 됐다는 게 유의미하다. 내가 이 많은 영화들을 만들었구나 싶어 자긍심이 생긴다. 이거면 됐지, 그 이상 가는 게 있나?
인터뷰가 끝난 뒤 임승용 대표, 그와 함께 <포인트 블랭크>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준우 프로듀서와 사무실 근처의 한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자리에서 지난해 도시바와 인텔이 함께 제작한 6부작 광고 <The Beauty Inside>의 판권을 며칠 전 구매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편당 10분 내외의 영화 같은 광고로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다). 매일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알렉스라는 남자가 이 광고의 주인공이다. 어느 날, 그는 레아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지만 그녀는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판타지 같은 이야기를 유려하게 설명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당장이라도 각색 시나리오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런 열정이야말로 제작자 임승용의 밑거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