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들이 늘어놓는 사적인 편견은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가 주는 ‘불쾌’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극화를 거친 편견은 인물간 대립을 통해 이야기 속에서 나름의 답을 찾기 마련이지만 그녀의 드라마 속에서 의미없이 반복되는 정교하지 못한 편견은 대개 갈등의 자리까지 치고 올라오지 못했다. 대화보다 일방적인 전달에 가까운 대사들은 제각기 성격을 지닌 캐릭터를 지켜보는 느낌보다 작가의 경험과 편견을 공유하는 임성한-a, 임성한-b, 임성한-c의 무한 반복처럼 보이기도 한다.
잠깐 들어도 작가가 누군지 대번에 파악할 만큼 독특한 스타일에, 일상적인 대사가 많고 옹호하는 가치관이 강력하게 드러나는 점에서 김수현 작가와 임성한의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연인이든 혈육간이든 도덕의 화신이든 징글징글한 속물이든 간에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일 없이 자신의 온 존재를 건 듯 격렬하게 맞서는 김수현의 인물들에게 비하면, 임성한의 인물은 ‘피고름’ 등 강렬한 표현에 집착할 뿐 현실이라면 면박을 당하거나 비웃음을 살 만한 편견을 서로 걸러주지 못했다. 전자의 대사는 편견을 겨냥해 허물고, 후자의 대사는 편견이 떠도는 풍경이랄까.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가 일상생활의 절차와 습관에서 리얼리티를 추구한다면, 기든 아니든 책임질 필요없이 어디서 주워들은 허튼소리가 오가는 와중에 식탐만 번뜩이는 임성한의 식탁에도 방만함이 빚어내는 리얼리티가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식탐도 비교해보자. 감자를 삶아주니 전처가 챙겨주던 왕소금 이야기를 꺼내며 ‘감자에는 왕소금’이라 집착하는 식탐에 욕망과 환멸을 압축하는 게 김수현의 드라마. 그리고 야채와 당면을 따로 볶은 잡채를 원하며 ‘지단은 왜 안 올렸느냐’ 집착하는 식탐을 욕구로 해석하고 심상하게 받아넘기는 쪽이 임성한의 드라마다. 건강에 유익한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길고 자세하게 보여주는 것도 식탐과 건강에 대한 집착이 만나는 지점. 취향을 구체적으로 전시하는 임성한의 노골적인 방만함에 큰 흥미를 느끼는 한편, 개똥철학에 맞장구를 치는 식의 대화가 주는 지리멸렬함과 그 과정에서 노출되는 편견을 견디는 데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 또한 함께했다. 이는 임성한 드라마의 근본적인 약점이었다.
출처가 모호한 정보와 엄밀하지 못한 범주로 편견을 양산하던 임성한 드라마에서 마치 ‘이이제이’처럼 편견을 다른 편견으로 제압하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진 것은 MBC 드라마 <보석비빔밥>부터였다. 그리고 이 변화는 신작 MBC <오로라 공주>에서도 이어진다. 주인공 오로라(전소민)는 부잣집 막내딸로 가족 내에서는 “로라 말만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평가를 받고 자신도 “나의 총명과 지혜로움을 누가 당해?”라고 말하는 캐릭터다. 동네 미용실에 비치된 주부잡지(광고 면 포함)를 통째로 삼킨 듯, 쉼없이 생활정보를 옮기고, 오빠의 불륜에 해결사를 자임하며 자신의 지혜를 뽐내는 오로라. 그러나 책 읽는 것으로 자주 유세를 떨던 그녀도 좋아하는 작가 황마마(오창석)의 가짜 인터뷰 자리에선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거나 출처를 기억하지 못한 구절을 들먹이다 황마마의 비웃음을 산다. 나 잘난 맛에 사는 이가 더 잘난 척을 하는 사람에게 망신을 당한 셈이다.
속물성을 감출 마음이 없는 임성한 작가의 인물들을 보며 어쩌면 그녀의 드라마는 맑은 정신으로 일정 거리를 두게 하는 장점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으음, 여전히 귀신이 함께하고, 생사여탈권을 쥔 극 밖의 작가가 언제 극중 인물에게 급살을 내릴지 모른다는 공포가 뒷덜미를 잡아채니, 아직은 무리다.
+α
생활의 지혜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는 요리 팁을 비롯한 생활정보를 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데, <오로라 공주>도 예외는 아니다. ‘비듬은 계란 흰자를 거품내서 감으면 없어진다’, ‘탄수화물을 먹으면 저녁에 잠이 잘 온다’, ‘젊어서 햇볕에 많이 노출되면 늙어서 백내장 걸린다’ 등등. 앞으로도 끝없이 반복될 이 정보들에 큰 의미를 두는 것보다 할 말이 없을 때 오가는 흰소리 정도로 듣고 흘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