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 만에 다시 만난 김선 감독은 핼쑥해진 얼굴에 비해 표정만은 밝은 모습이었다. 지난 1월, 그는 박근혜 마네킹을 주인공으로 한 정치풍자영화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이하 <자가당착>)에 두 차례 제한상영가 판정을 내린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를 상대로 제한상영가등급분류결정취소 소송을 낸 상태였다. 이윽고 5월10일, 서울행정법원은 “성인으로 하여금 이 사건영화를 관람하게 하고 이 사건영화의 정치적, 미학적 입장에 관하여 자유로운 비판에 맡겨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김선 감독은 “자가당착에 빠진 영등위도 얼마나 힘들겠냐”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고 몇번이고 힘주어 말했다.
-승소한 소감이 어떤가. =당연하게도 승소했는데, 당연하지 않게도 패소를 예상했었다. 영등위가 등급 관련 소송에서 한번도 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인데 윤창중 때문에…. 제목이라도 도발적으로 뽑아달라. ‘박근혜의 하수인 영등위야, 자멸하라’ 어떤가. (웃음)
-이렇게까지 강경 대응을 하게 된 계기라면. =영등위가 말 바꾸기를 한 게 컸다. 1차 심의 때는 주제 면에서 특별계층에 대한 혐오감을 문제 삼다가 2차 때는 폭력성이 문제라는 거다. 거기다 사유는 달라도 등급은 동일하니 더 공정한 판정이 아니냐는 궤변까지 내놨다. 그 기만술에 열받아서 법의 잣대를 빌려서라도 담판을 짓고 싶었다.
-상대의 비일관성 때문에 법정에서도 대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나중엔 선정성까지 들먹이기에, 청소년 관람불가 받은 영화 중 가장 잔인한 영화와 가장 야한 영화를 모았다. 그중 <옥보단3: 관인아요>는 알아서들 보신다고 해서 <킬 빌>만 틀었지. 법정에서 비교해가며 보면 참 부조리하다. <자가당착>이 얼마나 잔인한지 한번 보시죠, 했는데 박근혜 사진 위로 칼이 날아오면서 종이가 훅 뜯어지고 컷 되면 마네킹 머리가 떨어지면서 피 나오고. 내가 봐도 조악한걸. <셀레브리티 데쓰매치>도 결정적 자료였다. 미국에선 실제 정치인들이 링 위에서 싸우다가 사지절단되는 내용의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1990년대에 애들도 다 보는 <MTV>에서 방영했다니까. 그래도 영등위는 시종일관 ‘풍자는 허용하되 지나친 풍자는 안된다’, ‘정치인들을 풍자하는 건 괜찮아도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안된다’는 식이었다.
-정치풍자로 제한상영가를 받은 첫 영화로서 좋은 판례를 남겼다. =정치풍자로 제한상영가를 주는 것의 부당함을 알린 첫 사례이기도 하다. 이번 판결로 영등위가 특정 정치인을 비호함으로써 헌정 문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게 딱 드러난 거지.
-박주민 변호사는 영등위가 무조건 항소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어떻게 할 계획인가. =영등위가 판결을 받아들여 제한상영가 판정을 철회하면 다시 심의를 넣고 개봉까지 갈 것이다. 설마 또 제한상영가를 주는 ‘돌아이’ 짓은 안 하겠지. 하지만 항소하면 대법원까지 갈 각오도 하고 있다. 개봉도 계속 늦어질 수밖에 없을 텐데, 행정 소송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터넷에 클립들을 뿌릴까도 고민 중이다.
-이번 소송이 제한상영가 제도 자체를 없애진 못한다. =그래서 한국독립영화협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문화연대 등이 합심해 제한상영가 철폐 운동을 벌이고 있다. 박주민 변호사는 제한상영가 위헌 소송도 준비 중이다.
-그 와중에 <자가당착>은 6월 일본 이미지포럼에서 먼저 개봉한다. =한국 관객에게 제한상영가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해외에서 먼저 개봉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미지포럼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험영화 아카이브고 전공투 세대가 주축이다 보니 우리 상황을 듣고 적극적으로 나서준 거다. 근데 일본에선 중고생 관람가로 개봉한다. 한국에선 “성인”에게 보여주기도 이리 어려운데. 여러모로 웃긴 상황이다.
-이번 판결이 김선 혹은 곡사에게 어떤 영화적 생리작용을 낳을까. =우리가 워낙 거부감 없이 막 생리작용을 하는 사람들이라 분명 리액션은 있을 것이다. 몇편 준비도 돼 있다. 제한상영가 판정에 대한 반사적 리액션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교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면도 있다. 홍성담 화백이 그린, 박근혜가 박정희 낳는 그림 있잖나. (직접 그려주며) 이런 느낌의 문화 활동은 계속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