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이십대 중후반과 삼십대 초중반을 꼬박 바쳤던 회사를 불시에 그만두고 나자 한동안 밤샘 마감이 없어도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졌다. 내 인생 최고의 시간들은 이미 끝나버린 것 같은데 늘어난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앞으로 살날이 50년은 더 남았고, 최소한 그 절반 정도는 일을 해야 할 텐데, 도대체 뭐 해먹고 살 것인가. 돈도 돈이지만, 스스로 가장 신나게 살았던 시기를 떠나보내고 남은 것은 고단하게 펼쳐지는 일상과 현실적인 문제뿐이라는 게 마음을 자꾸 가라앉게 만들었다. 인생에 뭐 하나 정리된 것도 없는데 애매하게 나이만 먹고 고민거리는 늘고 체력은 달리고, 어떡하지 나?
그러던 중 QTV <20세기 미소년>을 만났다. 사실 90년대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H.O.T의 문희준과 토니안, 젝스키스의 은지원, god의 데니안, NRG의 천명훈이 한 프로그램에 출연하다니, 토니안 말대로 “90년대였으면 출연료가 감당 안돼서” 모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천명훈의 말대로 “개인 활동도 할 수 없었던” 오빠들의 합동 프로젝트는 궁금하면서도 불안했다. 팬들 앞에 영원히 하나라는 약속은 세월과 함께 부스러진 지 오래고 화려했던 과거에 비해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은, 음반만 내면 1위를 하던 시절과 달리 솔로 활동을 하다가 ‘감 떨어진 것 같다’는 소리마저 듣는 서른여섯살의 남자들이 과연 2013년에도 먹힐까?
그런데 집단 토크쇼에서 MC들의 호들갑스런 소개말과 함께 ‘아이돌의 조상님’으로 불리며 조카뻘 후배들의 깍듯한 예우를 받을 때는 어딘가 어색하고 안쓰러워 보이기조차 했던 오빠들은 동갑내기끼리 모이자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세상을 다 쓸어버릴 것 같던 패기와도, 사랑에 매번 목숨을 걸던 격정과도 멀어지고 모처럼 멋부려 입은 의상이 불편해 반나절 만에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을 만큼 ‘아저씨화’된 오빠들은 전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운 존재는 아니었지만 훨씬 친근한 생활인이 되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절정의 인기를 누린 뒤 팀 해체와 인기 하락, 악플, 루머, 경제적 어려움, 이혼을 거치며 살아남는 동안 그들이 견뎌야 했을 삶의 무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록 후배 아이돌의 안무를 따라하다 보면 관절이 시리고 카메라 앞에서 서로 흰머리를 뽑아줘야 할 만큼 노화를 실감하면서도 “방송에서 홀아비 냄새는 안 나면 좋겠다”며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건 신인 시절의 풋풋함과는 또 다른 귀여움이다. 오래전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수줍게 나누고, 사소한 배려와 칭찬에 감격하며 ‘실시간 검색어 1위’라는 소박한 목표를 향해 ‘핫젝갓알지’의 뮤직비디오를 준비하는 과정에는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면서도 ‘추억팔이’로 소진하지 않는 이 프로그램의 태도가 담겨 있다. 예전처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도 않고, 라이벌 그룹간의 미묘한 경쟁심이나 차트 1위에 대한 강박도 없이 고난과 영광을 공유하는 옛 동료들이 재회해 차츰차츰 친해져가는 모습은 어쩐지 뭉클하기도 하다. 다시 정상에 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편의 프로그램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하루 연습하면 이틀 못 일어나는 체력에도 폐가 터져나가도록 춤을 추고 형광등 조명으로 세월의 흔적인 주름을 지운 오빠들은 이상하게 마음에 위안이 돼주었다. 가장 멋진 날들은 이미 지나갔는지 모르지만 지금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그러니까 앞으로도 생각보다 괜찮을지 모른다는 희망 같은 게 슬쩍 돋아나도록.
+α
오빠의 재발견
NRG 시절 H.O.T나 젝스키스, god와 ‘스펙’이 달라서 <20세기 미소년> 역시 자신이 끼어도 될 자리인지 고민했다는 천명훈, 1997년 <할 수 있어>로 1위 후보에 올랐지만 IMF로 방송사 순위 제도가 없어지는 바람에 물거품이 된 꿈을 ‘핫젝갓알지’의 뮤직비디오 프로젝트로 대신하며 감격한다. 다른 멤버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며 “1위를 경험해본 너희들과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좋아”라는 이 남자, 이렇게 귀엽고 겸손한 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