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을 날리고 스케치북을 넘기는 이벤트보다 상대 머리 위로 내려앉은 벚꽃을 떼어주며 수줍게 운을 떼는 소박한 청혼이 어울리는 계절. 벚나무 길을 걸으며 그림 같은 데이트를 즐겼으나 영 좋지 않은 타이밍에 청혼한 남자와 집에 돌아가고픈 마음에 사로잡힌 여자가 있다. MBC 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의 한태상(송승헌), 서미도(신세경) 커플 이야기다.
서른아홉과 스물일곱. 열두살 차이 남녀의 첫 만남은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채업을 하는 보스 밑에서 일하던 태상이 미도 아버지의 헌책방에 수금을 하러 찾아갔던 것. 독한 눈빛으로 맞서는 미도를 보며 집안의 몰락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 태상은 미도네 사채이자를 탕감해주고 미도를 위기에서 구했으며 이후로도 어려움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를 지원했다. 회사를 키우고 문화사업을 시작한 태상이 사랑을 키운 7년 동안, 미도는 나이 많은 깡패 아저씨의 영문 모를 호의에 두려움과 모멸감을 느끼며 언젠가 ‘빚’을 청산할 때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졸업 뒤 태상의 회사에서 일하게 된 미도에게도 변화는 있었다. “나 속물인 거 인정해. 아빠가 누워 계신 동안, 친구들이 에펠탑 열쇠고리를 주면 죽고 싶었어.” 미도는 업무를 핑계로 괌 여행을 보내주고 친구들에게 밥을 살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는 태상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자신 앞에선 소년이 되어버리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한편 미도의 주변을 맴도는 또 다른 남자 이재희(연우진)는 접어둔 꿈을 상기시키는 사람이다. 그는 미도가 무대미술에 관해 스크랩했던 옛 수첩과 공연 티켓들을 들춰보게 하고, 그녀와 비슷한 처지에서 성공한 예술감독의 강연을 듣도록 주선한다. 꿈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뭔가 더 해보고 싶은 욕망이 들끓는 그 시점. 태상은 벚나무 길을 걸으며 수줍게 청혼한다. “나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니?” “그래 티티(애칭)는 좋은 남편이 될 거야.” 커플링을 손에 끼는 대신 목걸이로 걸어두고 관계의 진전을 유예하던 미도는 예스, 노를 말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듣기 좋은 거짓말 대신 상대의 말을 그대로 반복한다. 두 남자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는 그녀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기 애매한 이유 중 하나는 극의 절반을 지나오는 동안 미도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괌 여행에서 ‘STANFORD’ 티셔츠를 입고 바에 앉아 있던 미도는 같은 옷을 입고 ‘그쪽도 스탠퍼드 나왔냐’고 반가워하는 재희에게 이렇게 답한다. “아뇨. 동대문에서 산 건데요.” 관광지에서의 가벼운 흥분에 젖어 거짓말을 하거나 둘러댈 법도 한데 도리어 사실을 드러내 받아치는 미도는 공격적일 만큼 솔직하다. 자존감이 높고 영악한 그녀는 불필요한 거짓말로 이후에 곤경에 처할 일을 만들지 않는 한편, 불필요한 진실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재희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했으나 그가 한태상이란 것은 제 입으로 밝히지 않으며, 태상의 전화에 늦은 밤 버스에 두고 내린 수첩을 찾으러 나갔던 일을 이야기하면서도 같이 있던 사람이 재희라는 것까지 말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진실의 일부분만 드러내는 편이 더 유리하다는 본능적인 판단. 진실과 거짓, 거짓과 거짓이 속고 속이는 드라마와 비교해보면 <남자가 사랑할 때>의 서스펜스는 진실의 어디부터 어디까지 말하는가, 그리고 어느 부분을 말하지 않는가에서 발생한다. 최근 몇년간 드라마의 많은 여성 캐릭터가 생존이나 욕망의 실현을 위해 거짓말의 성채를 쌓아올렸다면,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서미도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α
영 좋지 않은 타이밍의 청혼
2005년 MBC 베스트극장의 4부작 <태릉선수촌>에도 어긋난 타이밍의 쓸쓸한 청혼이 있었다. 수영선수 동경(이선균)은 오랜 연인인 양궁선수 수아(최정윤)에게 의젓한 오빠 같은 존재였다. 올림픽 최초로 접영 결승에 진출했으나 메달을 따지 못한 동경은 결국 은퇴를 결심한다. 불투명한 미래와 연인의 마음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던 불안 속에서 동경은 불쑥 수아에게 “결혼하자”고 말한다. 언제나 짐짓 여유있는 모습이던 동경이 처음 무너진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