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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야생은 없다

<정글의 법칙>, 리얼리티쇼에서 보여지는 원시의 허구

국도변을 스쳐지나가는 여행자에게 시골은 ‘고향의 정취’이며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이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 며칠만 지내보면 오늘날 시골의 삶이란 아슬아슬한 평균대 위에서 간신히 노령 인구가 버티고 서 있는 안타까운 현실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카메라는 어떻게든 프레임 안에 ‘고향의 맛’을 담아야 한다. 그런 일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6시 내고향>이나 <한국기행>, <걸어서 세상 속으로>나 심지어 <세계테마기행>도 그러하다. 우선 시골 장터부터 찾으며 시작한다. 그 ‘고향’과 ‘세상’은 카메라에 의해 재현되고 편집된 세상이다.

조작과 판단 사이

<총, 균, 쇠>로 유명한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서구의 다큐멘터리 카메라들이 남태평양이나 아프리카의 오지 부락을 취재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흠결이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문명’과 단절되어 있는 곳에서 ‘문명’에 결핍되어 있는 공동체성, 가족주의, 자연친화성을 찾다 보니 ‘원시’부족의 21세기적인 고통이나 가부장에 따른 문제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예능국’에서 제작하는 리얼리티쇼는 말해 무엇하랴. SBS 예능국 제작의 <정글의 법칙>을 보면서 다큐의 진실성을 바라는 시청자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른바 ‘문명’이 도착하지 않은 곳에 가서 야생의 생존 게임을 벌인다. 그 과정에서 과도한 편집과 취사선택, 특정 장면에 대한 감각적인 자막, 카메라의 몸부림, 동료 연예인들끼리의 갈등과 그것을 매끈하게 감싸버리는 끈끈한 ‘우애’, 현지 원주민들의 ‘순박’하다고 여겨지는 삶에 대한 감탄의 내레이션이 ‘정글의 법칙’에는 가득하다. 그 세부의 장면들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과 진실 혹은 낱낱의 장면들은 아직까지 ‘야생의 삶’을 살고 있는 원주민의 본질적인 삶과 다르다. 카메라는 언제나 ‘이쪽’에 있고 저 건너편에 허연 이를 드러내고 있는 부족들이 있다.

한때 <정글의 법칙> 조작 논란이 있었다. 여배우 박보영씨의 매니저가 토로한 내용이 일파만파로 번져 결국 제작진이 지난 2월에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시베리아’편을 연출했던 정준기 PD는 “좀더 재밌고 감동적인 장면을 선물하기 위해 이미 있는 사실을 약간 더 화려하게 포장하기도 했고 일부 상황을 진실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가공했다”고 밝혔다.

지리산 같은 곳에 가도 깊은 숲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고, 밤새 등정하거나 비박하는 사람들을 존경해온 내 입장에서는 정준기 PD가 사과 성명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내용, 즉 “오지에서 많은 출연자와 스탭들이 수십일 동안 견뎌야 하는 최악의 조건에서 제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리얼리티는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한’ 리얼리티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한다. 그들은 다큐를 찍으러 간 것이 아니라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리얼리티쇼 프로그램을 찍으러 간 것이다. 정준기 PD에 따르면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 아무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을 아무 준비도 없이 마주한다는 것은 연출자로서 선택할 수 없”다. 담당 PD로서는 “출연자와 스탭들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리하여 <정글의 법칙>은 “어느 정도 알려진 곳, 다른 사람들이 이미 다녀본 경험이 있는 곳과 같이 여러 변수를 통제할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하게 된다. 나는 이 점을 의심하지 않으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위험’해진다. 그 ‘위험’한 방향이란 오지라는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으로서는 매우 조심스러워야 할, 해당 지역 사람들의 삶에 대한 ‘판단’이다. 이것이 위험하다. 담당 PD가 밝힌 대로 <정글의 법칙>이 만나는 부족은 “이미 알려져 있고 현대 문명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른바 ‘현대 문명’과 완전히 격절되어 인류사의 어떤 비밀을 간직하거나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과정에서 ‘병만족’이 뭔가 깨달음을 얻고 우애가 깊어졌다는 식의 ‘프레임’이 위험한 것이다.

대도시의 문명을 떠나 낯선, 오지의, 야생으로 가면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은 ‘일그러진 오리엔탈리즘’이 되기 쉽다. 아마존이 그렇고 티베트가 그렇고 킬리만자로가 그렇다. ‘당대성’이 상실된 원시란 없다. 그러나 프레임 바깥의 현실, 그 ‘야생’이라는 조건을 예능적으로 주시하게 되면 ‘당대적 상황’은 부지불식간에 사라진다. 그들이 겪고 있는 21세기적 상황은, 카메라 안으로 들어오면 안된다. 그들은 저 ‘원시적, 태곳적, 야생적’ 조건에 있어야만 한다.

인류학적 확신의 위험성

그래서 어찌되었던가. MBC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은 결국 비극으로 끝났다. 그곳에 가서 고생한 제작진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이른바 ‘문명’이 닿지 않은 ‘야생의 삶’을 찍었을 때, 그 프레임 바깥은 학살의 위험한 공기로 둘러싸여 있었다. 2012년 8월 말의 비극적인 외신 보도를 기억해보자. 베네수엘라 남부 원주민 마을이 금광업자들의 습격을 받아 대량 학살당했다. 금광업자들이 유린해버린 부족 마을에는 “불에 그을린 시체가 넘쳐났으며 공동 가옥은 불타 잔해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 80명 가운데 단 3명만이 살아남았다. 총소리와 폭발음과 헬기 소리가 마치 영화 <지옥의 묵시록>처럼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1993년에는 16명이 살해당했고 2010년에는 원주민 3명이 광산 개발에 따른 오염수에 의해 숨졌다. 그 야노마미 원주민들이 우리가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에서 보았던 바로 그 부족이다. ‘문명에 찌들지 않은 원시적 삶의 순수함’이라는 프레임 바깥에는 곧 문명에 파괴되고 학살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이럴진대 예능국이 제작하는 <정글의 법칙>이 거의 인류학적 확신에 가득 찬 감정을 내레이션과 자막으로 압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위험’한 조건이다.

이런 이유로 이미 오래전에 <슬픈 열대>의 저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여행기, 탐험 보고서, 또는 사진첩의 형태로 된 아마존, 티베트, 아프리카 이야기들이 서점을 뒤덮고 있는데, 이 책들이 주로 인기만을 염두에 둔 채 쓰여지고 또 편집되었기 때문에 독자는 그 속에 담긴 증언의 가치를 식별할 길이 없다”고 썼던 것이다.

프레임 밖의 진짜 원주민

<정글의 법칙> 부국장 실종 사건

실종! 긴급 사태가 발생했다. 리얼리티쇼 제작 와중에 진짜 ‘리얼’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2012년 1월13일 방송 내용을 보면, 코로와이족을 방문했던 정순영 부국장이 본진을 이탈해 정글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제작진은 긴급 수색작전에 나섰다. 헬기까지 동원되어 수색작업이 펼쳐졌다. 모든 인원이 총동원되어 밀림이동 경로를 샅샅이 뒤지고 배를 타고 강가까지 수색했다. 방송 화면의 왼쪽 상단 자막은 ‘26시간의 실종’이라고 쓰여 있다.

마침내 부국장이 구조되었다. 실종 직전에 마지막으로 부국장을 봤었다는 막내 PD는 오열하며 주저앉았다. 모두가 안도감과 함께 눈물로 부국장을 맞이했다. 그는 모기에 온몸을 물렸고 탈수 직전까지 간 상태라 지친 기색이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화면은 그 ‘리얼한 실종 상황’을 그래픽까지 활용해서 방송으로 내보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실종 사건이 벌어졌을 때, ‘진짜 리얼’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동안 화면에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대거 출동한 것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화면의 자막은 ‘현지 원주민’까지 총동원되어 샅샅이 수색했고 마침내 ‘원주민’에 의해 부국장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준다. 그런데그 ‘원주민’의 옷차림을 보라. ‘문명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지와 셔츠에 모자까지 눌러쓴 차림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화면 ‘안’에 있던 ‘원주민’과 이제까지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화면 ‘밖’의 원주민은 다른 부족인가. 어떻게 ‘문명’이 닿지 않는 그 밀림 오지에 나타날 수 있었는가. ‘긴급 상황’ 발생과 더불어 나타난 그 ‘원주민’은 어디에 있다가 등장한 것인가. 혹시 프레임 바깥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프레임 바깥의 삶이 그들의 원래 삶이 아닐까. 이런 합리적 의문 때문에라도 <정글의 법칙>은 인류학적 감탄을 거듭 반복하는 내레이션과 자막을 신중하게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