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편 JTBC의 <썰전>은 “독한 혀들의 전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그래서 처음엔 독설가들이 출전해 피 터지게 싸우는 토론 프로그램이구나 생각했다. 막상 방송을 보니 아니었다. 포맷이 둘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정치토론이고 다른 하나는 미디어 비평이다. 형식은 토크쇼이고 내용은 리뷰다. 이른바 ‘리뷰 토크쇼’를 표방한다. 한주 동안 있었던 핫한 정치 이슈, 예능 이슈를 가지고 ‘썰’을 풀어내는 것이다. 장르가 뒤섞여 있지만 어쨌든 토크쇼의 일종이고, 굳이 이름 붙이자면 하이브리드 토크쇼라 할 수 있다.
돌직구와 개드립
지난 2월 첫 방송 이후 빠르게 입소문을 탔고 인터넷 반응도 괜찮은 편이었다. <썰전>의 재미는 역시 “지적질”에서 나온다. 그야말로 가차없는 ‘돌직구’가 초 단위로 쏟아져 나온다. 지적질은 출연진 서로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KBS 예능 프로그램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이하 <남격>) 폐지를 이야기하던 중 영화평론가 허지웅은 “한달 정도 텀을 두고 보면 여전히 합창단 하고 있고, 좀 시간 지나서 돌리다보면 또 합창단 하고 있고…”라며 옆에 앉은 <남격> 멤버 이윤석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하지만 독설만으로 일관하면 시청자들이 건조함과 부담감을 견디지 못한다. 중간중간 깨알 같은 ‘개드립’(개그+애드리브)과 ‘뒷담화’들이 배치된다. 전직 국회의원 강용석이 과거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을 과시한 에피소드는 방송 직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애창곡이 솔리드의 <천생연분>인데 100명이 넘는 원외위원장 중 노래를 아는 게 오로지 나 한 사람이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랩 부분에서 뛰어나가서 랩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썰전>을 다른 고만고만한 종편 토크쇼들과 구별짓는 미덕은 다른 데 있다. 매크로(macro)도, 마이크로(micro)도 아닌 ‘메조(mezzo: 중간, 중범위) 레벨’의 토크라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비유다. 매크로 레벨 토크쇼가 큰 이슈, 공적 이슈를 본격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다룬다면 마이크로 레벨 토크쇼는 작은 이슈, 아주 사적인 이슈를 다룬다. 한국에서 토크쇼라고 하면 대부분 후자에 해당한다. 어느 셀레브리티의 ‘기구한’ 인생역정을 시시콜콜 늘어놓고 마지막에 거의 강요되다시피한 눈물을 짜내며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요”로 마무리하는 식이다. 마이크로 레벨 토크쇼는 “동일시냐, 아니면 타자화냐”라는 이분법의 세계, 공감을 빙자해 사생활의 적나라한 노출을 엔터테인먼트로 만드는 세계다. 이런 ‘사연의 세계’는 정치•경제•사회 영역이 아니라 사적 보편성의 영역이며 토론의 대상이 아니므로 특별히 인지자원을 많이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저 감정의 파고에 몸을 맡기면 된다.
한편 매크로 레벨 토크쇼는 비교적 무거운 이슈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물론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배제하고 글자 그대로의 공적 이슈만 다루는 토크쇼는 존재하지 않지만 대체로 진지한 주제를 심도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사연의 세계’와는 차별화된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CNN>의 <래리 킹 라이브>가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도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이를테면 2000년대 중반 한국 CBS TV에서 방송됐던 <정범구의 시사토크>가 본격 시사토크를 표방한 프로그램 중 하나인데, 1년을 겨우 넘기고 사라졌다. 시사토크 형식은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포맷으로 시도됐지만 대부분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는 실패해왔다. 그러다 최근 대선 분위기를 타고 드디어 <박종진의 쾌도난마>(채널A)라는 히트상품이 나왔다. 인신공격 수준으로 발언 수위를 높이거나 출연자에게 ‘O’, ‘X’ 팻말을 들고 대답하게 하는 등 한계는 또렷하다. 하지만 <쾌도난마>가 본격 시사토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비평가와 대중 사이에서
메조 레벨은 단지 내용적으로 매크로와 마이크로를 섞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것은 관점의 문제에 더 가깝다. <썰전>이 정치계와 예능계를 향해 독설을 날릴 때, 출연진은 이해당사자 내지 단순한 시청자라기보다는 불편부당한 관찰자(spectator)가 된다. 이것은 비평가의 분석적 시선과는 또 다른 것으로, 대중이 대중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대중문화와 정치를 대상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평가도 대중도 아닌, 혹은 비평가이면서 대중인 시선. 이 시선은 기존의 대중/비평가라는 이항대립에 세 번째 주체를 추가한다. 또한 이 관점은 일본의 IT 비평가 우메다 모치오가 ‘총표현사회’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대중과 엘리트 사이의 중간층, 우리가 흔히 블로거라 불렀던 인터넷 사용자들의 시선과 겹친다. 요컨대 <썰전>의 스탠스는 오늘날 여러 SNS나 인터넷의 각종 커뮤니티에서 비교적 활발히 활동하는 ‘표현대중’의 그것에 한없이 가까워진다(표현대중’이란 말은 내가 만들어낸 말이다). 중요한 건 이 코드가 분명 흥행성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종편끼리의 경쟁도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한정된 제작비하에서 ‘독설’과 ‘배설’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 감정의 에스컬레이션은 금세 피로를 부르기 때문이다. <썰전>의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포맷도 다른 집단토크쇼에 비하면 신선하고 출연진의 면면에도 범상치 않은 ‘기획력’이 느껴진다. 그러나 결국 성패는 순식간에 변해가는 ‘표현대중’의 트렌드를 얼마나 신속하게 잡아채느냐에 달려 있다.
그를 바꿀 사람은 없다
<썰전> 최고의 캐릭터 김구라
<썰전> 출연진은, 이름값만 보면 확실히 ‘A급’은 아니다. 그러나 유명 연예인들을 대거 출연시킬 수 없다면 남은 건 개별 출연진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조합을 고민해야 한다. 홍석천이 중간에 빠졌지만, 현재의 팀은 신생 프로그램 치고 ‘케미스트리’가 좋아 보인다.
김구라가 메인 MC로서 프로그램의 톤과 속도를 장악하고 있는데 박지윤이 아나운서다운 매끄러운 진행으로 보조 MC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멘트 치는 순발력이나 센스도 발군이다. 이윤석과 허지웅이 주로 분석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이윤석은 방송현장 경험으로, 허지웅은 전업 비평가다운 날카로운 통찰로 무게를 싣는다. 또 하나 허지웅의 장점은 비평가치고는 비주얼이 출중하다는 점이다(강용석과 김구라를 번갈아 보여주다 허지웅이 비치면 안구가 정화되는 기분이 들 정도).
전반부 토론에만 출연하는 정치평론가 이철희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요즘 가장 좋은 정치평론을 생산하는 ‘정치통’인데, 깨알 같은 예능감까지 갖고 있다. 강용석은 전반부 토론과 후반부 ‘예능심판자’ 모두에서 활약하는 조커이자 리베로다. 김구라와 함께 이 프로그램의 얼굴 격. 그야말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어 최고의 캐릭터로 뽑을까 했지만 역시 김구라쪽이 훨씬 더 어울린다. 강용석은 ‘대체재’가 있지만 김구라는 대체재가 없기 때문이다.
예능에 대한 흥행감각, 만만치 않은 시사상식, 앞에 앉은 사람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는 독설능력을 동시에 갖춘 이는 대한민국에 김구라밖에 없다.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처음부터 그를 메인으로 염두에 뒀을 것이다. 이제 그는 ‘패널 김구라’에서 ‘진행자 김구라’로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토론의 호흡이나 톤의 업다운을 조절하는 능력도 돋보이고, 나서야 할 때와 빠져야 할 때도 잘 안다. <썰전>은 김구라가 지금껏 해온 어떤 프로그램보다 몸에 잘 붙는 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