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
오늘도 어김없다. 4시44분이다. 왜 오후 4시44분만 되면 시간을 확인하게 되는가. 3일 전에도, 그제도, 어제도…. 아니, 몇달 전부터 그랬다. 우연이겠거니 했다. 필연처럼 다가왔다. 사무실 책상 앞에서, 회사 옥상정원 벤치에서, 화장실에서, 택시 안에서, 그 어디서든 4시44분을 피할 수 없다. 며칠 전은 날짜까지 같았다. 4월4일 4시44분.
스마트폰이 죄다. 아니다. 죄다 스마트폰을 본다. 오늘 아침 출근길 전철 안의 풍경화를 되새겨본다. 한둘만 예외다. 앉아 있든 서 있든 죄다 눈을 44도 각도로 내리깔았다. 오직 그것만을 본다. 소리치고 싶다. 책 좀 봐라 인간들아! 아님 내가 만드는 신문 좀 봐라!! 그것도 아님 <씨네21> 같은 영화잡지 좀 보라고!!! 돈 주고 콘텐츠를 소비하는 인간들은 가뭄에 콩이다. 나도 하릴없이 주머니를 뒤져 스마트폰을 꺼낸다. 몇시지? 아침인데 이상하다. 4시44분.
몇달 전 <씨네21> 후배의 상가(喪家)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과 상봉했다. 육개장을 앞에 두고 아스라한 과거를 회상하다 어느 시점에서 턱 막혔다. ‘허문영, 김소희, 남동철, 다음에 누가 편집장을 했지? 누구더라?’ 머리를 회전문처럼 돌리며 한참을 헤아려보다가 깜짝 놀랐다. 헉! 맞아, 나였지? 내가 <씨네21>의 일원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까먹고 있었다. 알츠하이머가 의심되는 기억력을 복원해 당시의 시간을 돌이켜본다. 4시44분.
귀곡성이 흘렀다. 편집장으로 부임하던 2008년 10월, 영화잡지판의 분위기는 으스스했다. 주간지 <필름2.0>이 사라졌다. 월간지 두개도 같은 운명을 맞거나 옷을 갈아입었다. 영화잡지는 두개만 남았다. 2009년 8월 어느 영화제에서 <씨네21>의 유일한 시장경쟁자로 남은 주간지의 편집장을 만났다. 술자리에서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혹시 아세요. 만나는 영화계 사람들마다 곧 <씨네21>이 망한다는 얘기를 하던데…. 정말 그렇게 심각한가요?” 헛웃음만 나왔다. 소문은 익히 들었다. 정반대였다. 이쪽 정보로는, 그쪽이야말로 오늘내일하고 있었다. 소문은 4년 만에 현실로 이뤄졌다. 아, 한달도 안됐구나. 친구 <무비위크>의 4시44분44초44.
나의 헛웃음은 교만했는지도 모른다. <씨네21>의 경제지표 역시 4시44분을 향하던 ‘레미제라블’이었다.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는 ‘훈훈’했다. 아버지 <한겨레>에 가장 후한 용돈을 드리는 효녀로서의 명성이 자자하던 시절이었다. 흑흑, 내가 편집장을 맡던 1년3개월은 ‘흉흉’하기만 했다. 쪼잔해 보였을까. 2009년 4월 종잇값을 아끼려 판형을 줄인 것은 시간을 바꿔보려는 온갖 몸부림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은유로서의 4시44분, 그 불길한 시간들을 건넜다. 그래서 오늘이 있다. 영화 저널리즘 <씨네21>은 건재하다. 콘텐츠는 반짝인다. 자존심도 죽지 않았다. 다만 외로울 뿐이다. 서부영화의 외톨이 보안관처럼, 고독을 불태우며 초능력을 발휘한다고 믿어보자. 지금 <씨네21>은 몇시인가. 잘 모르겠다. 4시45분인가. 불안이 지배하는 시장의 한가운데서 더 총명하고 씩씩하고 오만해지기를 진심으로 빈다. 이젠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응원한다.
스마트폰을 꺼내 시계를 본다. 또 4시44분이다. 미치겠다. 이건 은유가 아니다. 강박인가, 머피의 법칙인가, 아니면 어떤 운명의 계시인가. 정신과에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