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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으로 돌아가라

<씨네21> 편집장(1995년 4월~2000년 5월) 현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 조선희

편집장을 한번 하면 5년은 해야지. 나는 그런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일했는데 내 후임자 중에 나만큼 질긴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창간 준비기간까지 하면 내가 <씨네21>과 함께한 시간은 무려 5년하고도 5개월이다!!

내가 편집장이었던 5년 동안 에디토리얼은 무기명 칼럼이었다. 나는 주로 기자들의 원고가 다 들어오고 데스크 작업이 한산해지는 마감날 저녁에 에디토리얼을 썼다. 그런데 한주 걸러 한주씩은 정말이지 할 말이 하나도 없어 막막한 마음으로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끄응~ 하고 용을 쓰면 몇 마디 말을 짜낼 수 있었지만 다음주는 또 어떡하나. 그래서 나는 도저히 에디토리얼을 쓸 수 없을 때 취재팀장이나 다른 누구에게 대신 쓰게 하려고 포맷에 캐리커처는 물론 편집장 이름조차 박아두지 않았다. 운 좋게도 5년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 다음으로 편집장을 한 사람들이 모두 나보다는 담대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씨네21>을 떠난 다음 한동안은 <씨네21>에 참견하고 싶은 마음을 참으려 애썼다. 하지만 제작진에서 독자의 입장으로 이동하는 데는 뜻밖에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순수한 독자가 되었을 때 <씨네21>은 훨씬 만족감을 주는 잡지였다.

그런데 몇해 전, 편집장이 바뀌고 지면 혁신호가 나왔을 때였다. 흔히 ‘빽’ (back)면이라 불리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유토피아 디스토피아’가 사라져버렸는데 어찌나 화가 났던지. ‘유토디토’라는 애칭을 가진 이 컬럼은 온갖 영화 이야기의 질풍노도 끝에 마련된 문명과 사회에 대한 사색의 장소였다. ‘유토디토’는 많은 스타 필자를 탄생시켰고, <씨네21>이 그저 하나의 영화잡지가 아니라 특별한 영화잡지라는 물증이었다. 창간 때 두명의 필자를 염두에 두고 이 난을 만들었는데 까칠하고 도도한 이 필자들과 승강이하면서 산고를 치른 것이 생생하건만 그런 얘길 새 편집장한테 해봤자 필통만 열개인 아이한테 엄마 어렸을 때 학용품 아껴 쓰던 얘기하는 것처럼 나른하게 들렸을 것이다. 어쨌든 최근 이 꼭지가 ‘디스토피아로부터’로 부활했을 때 왠지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오긴 돌아왔는데 어디서 고생을 심하게 했는지 행색이 영 못 쓰게 되어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씨네21>이 창간되던 시점은 영화잡지시장의 블루오션이 막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두 월간지 <스크린> <로드쇼>가 마주보고 있는 가운데 1995년, 두개의 새로운 월간지 <키노>와 <프리미어> 그리고 첫 영화 주간지 <씨네21>이 창간됐다. 갑자기 영화잡지시장이 뜨거워졌던 것인데 그래도 그때는 노량진수산시장이나 가락시장처럼 울타리가 분명하고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빤히 보이는 시장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잡지들과 경쟁했고 서로 강점과 약점이 노출되는 단순 소박한 시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울타리가 무너진, 안팎의 경계가 없는, 게다가 매체산업의 지형과 성질 자체가 끊임없이 바뀌면서 어디까지가 영화잡지시장이고 누가 경쟁상대인지 종잡을 수 없는 시장이다. 온오프라인 영화매체나 포털사이트뿐 아니라 파워블로거라 불리는 개인까지 복병으로 숨어 있다. 글쎄다, 이런 환경에서 당신이 다시 <씨네21> 편집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마 갈피잡기 힘들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맞춤법에 맞는 문장을 쓰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안목있는 비평을 제공하고 영화계와 영화산업의 현안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