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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센 놈인지 알려주마

프로레슬러 김남훈의 <전설의 주먹> 변칙 중계

영화 <전설의 주먹>을 봤습니다. 영화는 말 그대로 강우석표 영화였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한줄로 요약 가능한 캐릭터였고 배우들은 그걸 충실히 연기했습니다. 뭐, 그렇다고 재미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복잡다단한 캐릭터가 등장한다고 해서 영화의 수준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요. 영화는 두 시간 넘게 남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한 가지. 과연 그들은 ‘전설의 주먹’이었을까요?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봅시다. 과연 덕규(황정민), 상훈(유준상), 재석(윤제문)은 주먹도 셌을까요? 격투기 해설자이자 프로레슬러 입장에서 고찰을 해볼까 합니다. 먼저 누가 센지를 알기 전에 고등학교 다닐 때 일어나는 무력 충돌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짱’은 어떻게 결정되나

대개 학교에는 대가리, 짱, 통이라 불리는 주먹이 센 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누가 싸움을 잘하는지 어떻게 정했을까요? 일반적으로 권투나 격투기 시합이라면 챔피언과 도전자가 있고, 이때 벨트가 오가면서 강자와 약자의 서열이 만들어집니다. 또는 토너먼트로 16강, 8강, 4강, 이런 식으로 예선을 통과해서 마지막 승자가 월계관을 머리에 씁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통’이 이렇게 결정이 된 적 있습니까? 드라마 <응답하라 1997> 기준으로 봤을 때 한 학교에서 한 학년에 속하는 300여명 중에서 정말 이렇게 토너먼트 또는 그에 합당하는 공정한 룰로 ‘통’이 선발되었나요? 아닐 겁니다. 대개 반마다 왈패가 몇명씩 있고 이들은 자기들끼리 서열을 정한 것뿐입니다. 대개의 학생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거나 마지못해 이 서열을 인정했을 뿐이지요. 물론 이 왈패 무리에서도 그들끼리의 충돌, 즉 싸움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때 공정한 룰이 있었나요? 정말 선수들끼리 제대로 싸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을까요? 일요일 오전 케이블TV에서 중계되는 UFC 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입장할 때 양옆의 주홍색 재킷을 입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주(州)체육위원회에서 파견된 이들로 선수들이 대기실에서 나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동행하면서 행여 경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하는 일을 하지요. 싸움은 매우 정서적인 행동이면서 정신적인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상대편에서 잘나가는 선배를 뒤에 세운다거나 무리의 수가 더 많다거나 한다면 위축이 될 수밖에 없고 경기력에도 분명 영향을 끼칩니다.

자, 이제 한명씩 살펴보지요. <영웅본색>을 좋아하는 재석은 깡은 좋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패닉상태에서 흉기를 휘둘러 교도소에 갈 정도로 판단력이 부족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던진 왼손 잽은 재앙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재석은 친구들을 몰고 다니면서 겁을 주고 압박을 할 수는 있어도 실제 싸움에서는 섣부른 행동으로 인해 자멸할 공산이 큽니다. 덕규는 권투를 오랫동안 수련했기에 분명 뛰어난 신체능력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권투선수답게 타격에 대한 면역 또한 가장 뛰어났을 겁니다. 그러나 고교 시절의 키와 덩치를 보면 통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김광선 선수는 88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습니다. 체급이 플라이급으로 당시 그의 체중은 51kg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주력 체급이 경량급인 것을 감안한다면 올림픽 무대를 꿈꿨던 51kg 언저리일 확률이 큽니다. 51kg이면 웬만한 여자 연예인보다 가벼운 체중입니다. 이런 하드웨어 사이즈와 근력을 가지고 정말로 ‘체급에 상관없이 공정하게’ 주먹 실력으로만 승부를 봤다면 덕규가 상위 클래스에는 속하더라도 정말 1위까지 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럼 이제 딱 한명 남습니다. 바로 상훈입니다. 상훈은 하드웨어로 봤을 때 가장 가능성이 있는 후보입니다. UFC 톱클래스 파이터인 김동현 선수처럼 큰 키에 긴 팔과 다리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스타일은 운동하면 운동하는 대로 몸에 근력이 붙으며 지구력 또한 좋습니다. 영화 중간에 계단 난간을 밟고 점프하는 것을 보아 운동신경도 좋아 보입니다. 그럼 상훈이 과연 통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 상훈이 톱 파이터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럴 가능성이 적다고 봅니다. 영화를 보면 상훈이 아이들의 돈을 뺏는, 속칭 삥 뜯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성격을 가지고 최상위 클래스로 갈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인성론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을 벗어나서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갖기 위해선 파트너와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주먹에 일부러 맞아주고 샌드백을 붙잡고 무지막지한 파운딩 세례를 견뎌낼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또 때에 따라선 자신이 그런 인간 샌드백 역할을 해야 합니다. 효도르를 비롯해서 이 세계에서 이름을 날렸던 또는 날린 선수들은 그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체 남자들은 왜 저러고 사는 걸까요? 왜 저렇게 쌈박질을 좋아하는 걸까요? 영화에서는 성년이 된 주인공들이 ‘돈’ 때문에 싸우는 것 외엔 특별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깐 보조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제 직업은 프로레슬러, 그리고 격투기 해설자이기도 하거든요. 아무래도 현장과 가까운 입장에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그들이 링에 서는 이유

먼저 링 위의 세계를 동경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링 위의 박진감 있는 삶에 영혼이 눈먼 것이지요. 내 손이 상대방의 얼굴을 때릴 때 느껴지는 둔탁한 타격감. 왼쪽 허벅지에 상대방의 로 킥을 맞고 그 고통을 이겨내며, 붙잡고 쓰러뜨리고 올라타고. 우리가 인생에서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기 위해선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대학에 떨어지는 것도 적어도 1년(고3 기간)이란 시간이 필요하지요. 링은 그것을 압축시켜줍니다. 5분 3라운드. 15분 동안 승과 패, 둘 중 하나는 필히 찾아옵니다. 이 완벽한 귀결에 혼이 빨려들어간 것이지요. 또 한 부류는 링 밖을 피해 링 안으로 도피한 경우입니다. 링 안에는 오직 두 주먹만 있으면 됩니다. 챔피언이든 도전자이든 오직 두손 또는 룰에 따라 두 다리를 가지고 승부를 봅니다. 하지만 링 밖은 그렇지 않습니다. 동네 구멍가게는 이마트와 싸워야 합니다. 동네 커피집은 스타벅스와 싸워야 합니다. 수빈이네 국숫집도 프랜차이즈 국숫집과 싸워야 합니다. 이 경쟁이 말이 됩니까. 그래서 그 경쟁을 피해서 링 안으로 도피하는 것이지요. <전설의 주먹>에 나온 이들도 아마 이 두 부류 중 한곳에 속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링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방송국, 주최사, 스폰서의 피라미드 서열 안에서 가장 약자라는 것을 말입니다. 저도 몇해 전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두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당시 주최사로부터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은 ‘벨트를 직접 보관하려면 300만원의 보증금을 지불할 것’이었습니다.

지난여름, <전설의 주먹> 조감독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영화에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는데요. 강우석 감독이 텔레비전 고발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저를 보고 직접 픽업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약 일주일 뒤, 시나리오가 바뀌어서 분량이 많아진 까닭에 전문 연기자로 대체됐다는 통보를 받았는데요. 제 배역은 무엇이었을까요? 독자 여러분은 누구였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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