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의 역습이라고 해야 할까. 자칭 “도시의 기마족”, 평소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프리덤~”을 외치는 이준익 감독이 한국영화감독조합 사단법인 조합장으로 나섰다. 그는 취임 뒤인 지난 1월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 총회를 찾아 “감독조합은 영화산업의 여러 구성원과 함께 제협이라는 버스에 올라타겠다. 단, 그 버스가 종점까지 제대로 가지 못하면 버스를 폭발시켜버리겠다”는 뜨거운 농담도 던진 바 있다. 그렇다면 그와 감독조합이 향하는 종점은 어디일까. 그 답을 듣고자 4월1일 창립총회를 앞두고 그를 만났다. 더불어 그의 3년 만의 복귀작 <소원>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그가 극히 말을 꺼렸음에도, 우리가 알던 이준익이 아닌 다른 이준익들이 몸을 사리고 있는 영화임은 확실해 보였다. 동시에 olleh국제스마트폰영화제 집행위원장,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 자리도 맡고 있는 그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자타를 위해 마구 “분열 중인” 멀티플레이어였다.
-어떻게 총대를 멨나. =정윤철 감독이 찾아왔더라. 평소 문화 아나키스트로서 살아가고 있는 나한테 무슨 단체장이냐고. 근데 또 아나키스트로서 등 떠미는 후배한테 함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정관을 보니 임기가 2년이더라고. 그래서 못 박았지. 중임은 없다. (웃음)
-다음 타자부터 구해놓은 건가. =박찬욱, 봉준호, 최동훈, 류승완 다 거절하기에 다음 대표할래, 지금 이사할래 그랬지. 빨간약 먹을래, 파란약 먹을래, 노란약 없어. 그러니까 다 파란약 먹겠다고 해서 이사단만 열명이 넘는다. 감독들은 그 정도로 대표를 맡는 걸 벌 서는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 내가 먼저 벌 서기로 한 거다.
-조합이 설립된 게 2005년이니, 8년 만에 사단법인으로 새 출발을 하는 셈이다. =과거에 대선배님들이 만들어놓은 한국영화감독협회가 문화부 사단법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울시 사단법인으로 승인을 받느라 오래 걸렸다. 그동안은 임의단체였고. 그래도 영화단체연대회의 이춘연 대표 말마따나, 원래 감독들은 염소 똥과 같아서 똥 하나하나가 따로 놀고 잘 안 뭉쳐진다. (웃음)
-그럼에도 현 시점에서 한목소리를 낼 필요성을 느낀 이유라면. =한국영화가 또 다른 성장기를 맞이했던 지난 5, 6년 동안 자본의 힘은 막강해지고 생산자 집단의 권익은 약화됐다. 그 관계를 적절한 수준으로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감독은 연출자이기도 하지만 생산자 집단을 대변해야 하는 위치 아닌가.
-배경에는 지난해에 불거졌던 감독 해고 문제도 있었던 게 아닌지. =그 문제에 관한 한 대표로서 내 입장은 분명하다. 부당해고라면 당연히 조합의 이름으로 이의 제기를 해야겠지만, 약속을 불이행한 감독을 막연히 편드는 것은 폭력 행사라는 생각이 들더라. 앞으로 비슷한 사태가 발생하면 철저한 조사 뒤 조치를 취할 것이다.
-창립총회에서 발표할 내용 중 아무래도 감독표준계약서에 가장 큰 관심이 쏠릴 것이다. 어떻게 준비해왔나. =조합 내에 표준계약서 특별위원회가 있다. 한지승 감독이 위원장인데 지난해에 영진위에서 예산을 책정받아 두 연구원과 함께 일을 추진해왔다. 기본적으로는 미국감독조합, 유럽영화감독조합, 일본영화감독조합 등을 참조해서 한국형 감독표준계약서를 작성했다. 여기에 1달에 1번씩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촬영감독조합, 미술감독조합, 시나리오작가조합, 영화산업노조, 여성영화인모임 등과 영화단체연대회의도 가졌다. 그로부터 나온 구체적인 안들이 명시된 것이 표준계약서다. 그동안은 ‘표준계약서’라는 단어만 소비해왔는데 이제 실체를 가지고 쟁점화할 때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기획/개발 단계에서는 기획개발표준계약서를, 연출 단계에서는 감독표준계약서를 세분화해 적용할 것이란 계획이다. =기획/개발이라는 게 감독, 시나리오작가, 기획자, PD, 제작자 등이 모여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과정이잖나. 그 기간이 굉장히 긴데 현재까지는 구분없이 계약을 진행해왔다. 그렇다고 이것이 감독만을 위한 장치는 아니다. 기획개발표준계약서는 기획/개발에 참여한 모든 생산자에게 적용 가능하다. 이를 계기로 생산과정 전반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다른 분야의 표준계약서도 촉발될 것으로 기대한다.
-감독표준계약서의 골자는 무엇인가. =감독의 저작권 인정 문제다. 저작권법에 따르면 감독에게도 배우처럼 저작인접권(저작물을 공중이 향유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자에게 부여된 권리-편집자)이 있다. 하지만 그동안 감독도, 시나리오작가도 모두 자신의 저작권을 제작사에 양도했다. 그럼 제작사는 그걸 다시 투자사에 영구히 양도하고. 그러다보니 자본이 과도한 권리를 누리게 됐다. 대기업이 한국 영화산업 육성에 미친 순기능은 박수를 쳐야 할 정도지만, 그 역기능도 무시 못할 정도가 된 거다.
-가장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 역기능은. =생산자의 생태계가 궤멸되고 있다. 특히 미래의 젊은 생산자들에게 자긍심이 아니라 자괴감을 심어주는 시스템만 지속되고 있잖나. 당장 영화를 찍으려고 해도 스탭 지원자가 현저히 줄었다. 이대로 가면 자본도 제 발목을 잡힐 수밖에 없다. 극장이 있으면 뭐하나. 콘텐츠가 없는데. 그런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함께 건강한 분배구조를 만들어가야지.
-투자사들도 순순히 한배를 타려고 하나. =계약의 대상으로서 감독, 배우, 스탭들이 1차적으로 표준계약서의 현실화를 앞당겨야 한다. 그러면 우리와 계약한 제작사가 그 내용을 투자사와의 계약에도 포함시킬 수밖에 없다. 그게 늦어지면 그냥 공공의 선이 늦어지는 거지, 뭐. (웃음)
-이 와중에 복귀작 <소원>의 크랭크인도 앞두고 있다. <평양성> 이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작품이 있으면 아윌 비 백!” 하겠다고 했는데, 의외의 소재를 골랐다. =그 말이 엄청난 책임의식이 되어 돌아오고 있어서, 내가 <소원>에 관한 인터뷰는 안 하려고 한다. (웃음) 아동 성폭행이란 소재가 심리적으로 너무 불편하고 심지어 아프다. 감독은 영화를 찍을 때 그 감정과 심리 안에서 살아야 하는데 피하고 싶을 정도니까. 다만 보통의 상업적, 장르적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는 그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사건을 재밌게 나열하거나 복수의 쾌감은 없다. 뚜벅뚜벅 걸어서 마지막 장면까지 가야 하는데, 아, 그게 말로 설명이 잘 안된다. 이 영화가 어떻게 끝날지 나도 모르겠다. 사전에 말하는 건 다 부정확한 표현이 될 거다. 어쨌든 상처를 통과하기 위한 터널은 어둡고 길지만 그 터널을 빠져나오면 또 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 그것이 지난 수천년간 인류가 지탱해온 삶이 아닌가. 뭐, 그런 어마어마한 개념으로 덮어버려야지.
-그래도 이준익, 하면 떠오르는 코미디나 마당극이 아닐 건 분명하잖나. =그래도 이준익이 갖고 있는 천진성이 있잖나. 인간에게는 지옥에서도 웃으려는 생존본능이 있다고. 그것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고. 함부로 던져놓고 책임지겠다고 자기 검열만 신나게 하다가 엉뚱한 길로 갈까봐 무슨 말을 못하겠다니까. (웃음)
-그래도 물어보자. 최근 캐스팅, 헌팅까지 모두 완료했다. 준비 단계에서 막연하나마 완성될 영화에 대해 중요한 인상을 받은 것이 있다면. =배우들의 태도다. 꼭 순서촬영을 하게 해달라는 거다. 나 역시도 순서촬영이 이 영화의 만듦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섣불리 왔다갔다 하다보면 감정이나 심리를 지레짐작해서 거기에 끼워맞추는 식이 돼버리니까. 그러면 이 영화는 완전히 가짜가 되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모두에게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큰 변화는 최석환 작가도 없고, 타이거픽쳐스, 영화사 아침도 없다는 점이다. =신생 제작사의 창립작이라 나는 감독 역할만 하면 된다. 너무 좋다. 이전에는 제작, 시나리오 공동 작업, 심지어 배급에도 관여해서 자기 분열적인 선택을 많이 했거든.
-새로운 사람들과 작업하며 갈등은 없었나. =내가 갈등에 대한 공포가 있다. 그래서 조건에 나를 잘 맞춘다. 늘 하는 말이지만 영화라는 게 내 머리 30%, 남의 머리 70%로 만드는 거다. 그러니 내가 뭔가 해낼 거라는 생각이 아예 없다. 내 크리에이티브를 믿지도 않고. 태어날 때는 다 깡통인데 거기에 누가 윈도를 깔아줘서 뭔가가 돌아가고 있는 거지.
-전작들의 흥행이 기대에 못 미쳤던 게 사실이다. 그 경험이 <소원>에는 어떤 밑거름이 될까. =결과물을 감당해야 하는 공포는 언제나 어마어마하다. 근데 오염이 좀 정화됐다. 상업적인 계산이 오히려 상업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배운 셈이다. 그래서 이야기 자체에 대한 진중한 시선에 더 가치를 두게 됐다.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스마트폰영화제도 3회 만에 급성장하고 있다. =모든 소비자는 생산자를 꿈꾼다고 본다. 그걸 스마트폰이 실현해준 거다. 이제 영화감독은 그냥 하면 되는 거다. 초등학생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개막작도, 낙도 분교 5군데를 찾아가 아이들에게 영화 찍는 법을 가르쳐주고 그 결과물을 초청했다. 이런 게 권력의 해체 아니겠나.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도 맡고 있다. 아나키스트치고는 단체 일을 많이 맡고 있는 것 아닌가. (웃음) =내가 현실 순응적인 아나키스트다. 분열적인 인간이지. 권력에 복종하고, 뒤에 가서는 호박씨 까고. 한입으로 두말하고. 좋게 말하면 멀티플레이어, 나쁘게 말하면 다중인격자. 중요한 건 그걸 솔직하게 인정하는 거다.
-한편으로는 감독님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뜻인데. =아주 부담스럽다. 나눠줄 돈도 없고, 참…. (웃음) 욕 안 먹는 방법을 잘 아는 것뿐이다. 나이 먹을수록 잔머리가 커지거든. 내가 앞에서 말한 것도 다 믿으면 안된다. 이 안에 어떤 암수가 섞여 있는지 모른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