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개봉한 옴니버스영화 <오감도>의 단편 <끝과 시작>이 장편으로 만들어졌다. 민규동 감독은 이 과정을 “짧은 시에서 긴 시로 옮겨가는 작업”이었다고 표현했다. 그의 말처럼 <끝과 시작>은 함축적이고 상징적이어서 관객의 상상을 자극하는 ‘시’적인 영화다. 동창회에서 만난 정하(엄정화)와 재인(황정민)이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정하는 재인을 유혹하고, 재인은 정하에게 자신이 쓰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재인의 이야기는 곧 두 사람의 5년 뒤 미래다. 정하와 재인은 부부가 됐고, 재인은 정하의 후배 나루(김효진)와 가학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재인이 교통사고로 죽자 나루는 정하 앞에 나타나 곁에만 있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결국은 사랑과 속죄와 구원의 이야기. 동성애와 SM 코드는 사랑의 한 단면일 뿐이다. 개봉영화를 홍보하는 대신 새 영화 작업에 한창인 민규동 감독을 만나 <끝과 시작>의 파격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내 아내의 모든 것> 개봉 뒤 어떻게 지냈나. =시나리오 두편의 초고를 완성했고 그중 한편은 본격적으로 준비하려 하고 있다. 얼마 전엔 <무서운 이야기2> 촬영을 마쳤다. 전편 때 야심이 너무 커서 이번엔 엔터테이닝하게 만들고 있다.
-<끝과 시작>으로는 인터뷰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그런데 <씨네21>은 왜 하는 거지? (홍보사 직원을 바라보며) 우리가 읍소했어? 꼭 해야 한다? 그럼 무릎 꿇고 해야 하는 건가. (웃음) 뭐랄까, 영화가 곧 개봉할 것 같았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개봉이 미뤄졌다. 그러면서 이 작품에 대한 거리감이 좀 생겼다. 이제는 이 영화가 옛날 편지 같은 느낌이 든다. 편지를 꺼내서 떠들썩하게 읽으면서 ‘다시 들어보세요’ 하기엔 어색한 지점이 생긴 거다.
-<끝과 시작>은 에로스라는 주제로 엮인 옴니버스영화 <오감도>의 한 단편에서 출발한 영화다. 단편을 장편으로 확장한 이유는 뭔가. =<오감도>는 내용의 제한을 비교적 덜 받으면서 자유롭게 작업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임했다. 단편은 두 여자(정하와 나루)의 이야기였는데, 남자(재인)의 이야기가 액자식 구성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이야기가 확장됐다. 1억원짜리 영화고, 총 40신을 찍었다. 어떤 큰 욕심을 가지고 만든 작품은 아니다.
-처음 에로스라는 주제를 받고 떠올린 이미지나 이야기는 뭐였나. =기존에 다루어지지 않은 방식으로 에로스를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가학적이고 피학적이고 폭력적인 관계들, 그런 이미지들을 찍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거기에 죄책감, 속죄, 구원 그리고 첫사랑 이야기가 들어갔다. 마침표가 절대 찍히지 않는 첫사랑 이야기. 아주 순수해 보이는 첫사랑과 SM(Sado-Masochism, 가학-피학증)을 엮었는데, SM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 거부감과 선입견을 넘어보고 싶었다. 보통은 S가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것 같잖나. 그런데 취향이 어느 쪽인가? (아직 한 가지 취향을 발견 못했다고 하자) 둘 다 섞여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든 M이 권력관계에서 힘이 세다. 관계를 끝낼 수 있는 힘이 M에게 있으니까. SM에 대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관계의 균형, 그 잣대를 깨보고 싶었다.
-<끝과 시작>을 만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또 동성애 이야기야?’라는 반응은 없었나. =<내 아내의 모든 것> 찍을 때도 이선균하고 류승룡이 왠지 직관적으로 키스를 해야 할 것 같긴 했다. (웃음)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만든 지 10년이 되는 때이기도 해서 (<끝과 시작>이)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후일담이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키스할 때 종소리가 들렸다’는 대사로 그 느낌을 연결지어봤다(<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 ‘널 처음 봤을 때 큰 종소리가 들렸다’는 대사가 나온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때 효신(박예진) 캐릭터가 늘 아쉽고 안타까웠는데, 이번엔 억압받던 친구들이 살아남아서 채찍을 견디며 뻔뻔하게 자기 욕망을 달성하는 이미지를 보고 싶었다. 인권문제로 동성애에 접근하는 시각은 옛날에 벗었기 때문에, 좀더 진화된 방식으로 어떤 동성애자의 속깊은 사랑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전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꼬아놓았다. =사실은 정하와 재인의 하룻밤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 안에 이들의 5년 뒤 관계가 액자식 구성으로 들어간다. 현실과 이야기와 환상, 세개의 퍼즐이 마지막에 하나로 합쳐지는 구조다. 나루의 이야기는 정하의 씻김굿이다. 정하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분노를 나루를 불러내 씻어낸다. 그래서 하룻밤의 이야기와 이야기 속의 이 야기가 절묘하게 만나는 구조를 취했다.
-SM장면을 묘사할 때 표현의 수위도 생각했을 텐데. =처음엔 29세 이상 관람가를 생각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고 싶었다. 아이들 장난처럼 상징적으로 지나가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엔 노출이 없다. 살색 향연의 자극이 없다. 또 일본에 있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일본에선 촛농을 떨어뜨리거나 끈으로 사람을 묶는 건 평범한 행위에 속한다 그러더라. 그래서 아주 가까워진 순간 폭력을 가하고 질식시키는 이미지를 생각했다. 그게 물론 40년, 50년 전 <감각의 제국> 같은 영화에서 표현된 거지만.
-엄정화와 김효진, 두 여배우의 베드신도 등장한다. =굉장히 롱테이크로 찍었다. 마음에 드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컷을 안 했다. 그런데 오래 찍으면 감각이 무뎌지기 때문에 처음의 그 낯설고 이상한 느낌을 살리려고 몇 테이크 찍지 않았다.
-<끝과 시작> 이후 김효진에 대한 칭찬을 많이 했다. =촬영 3, 4일 전에 만나서 급하게 촬영에 들어갔다. 그전에 스무명의 여배우에게 거절당했었다. 여배우를 도저히 못 찾겠다고 하자 제작사 대표가 김효진은 어떻겠냐고 하더라. 김효진은 이런 영화를 가장 원하지 않을 것 같은 배우 중 한명이었다. 실험적인 영화에는 관심없겠지 했는데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막상 만나니 느낌이 굉장히 좋았다. 사실 노출이 있는 영화를 만들 땐 사전에 배우와 준비하는 시간이 짧으면 안된다. 자신이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배우가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감독이 신뢰를 줘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데 효진이는 기꺼이 영화에 자신을 던졌다.
-다음 작품에선 어떤 파격을 선보일 생각인가. =이 정도가 파격 같나? 어떤가?
-파격적이었다. =앞으로 이런 영화 하지 말라는 뜻인가 아니면 더 가라는 뜻인가. (웃음) 내 안에도 여러 세계가 존재한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은 굉장히 의지적으로 나의 우울을 감추고 막 뛰어놀았던 경우다. 그런데 <끝과 시작>처럼 나를 풀어놓으면 또 이렇게도 놀 수 있는 것 같다. 파격을 좇아가야지, 하진 않는다. 다만 만들려는 영화에 새로움이 없으면 시작을 못한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면 진부해지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이야기를 더 깊이 파고들어 표현하면 그게 새로움이 되고 파격이 되는 것 같다. 다음 작품은 시대극이다. 한국전쟁 전후의 시대를 다룬 3부작을 준비 중이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건 1949년을 배경으로 한 액션누아르다. 무법천지 해방공간에서 가치와 실용이 부딪히는 이야기다.
-끊임없이 이야기가 샘솟는가 보다. =할 얘기는 많고, 인생은 너무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