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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들로 이루어진 구름

<헤르메스> 미셸 세르 지음 / 이규현 옮김 / 민음사 펴냄, <주자의 자연학> 야마다 게이지 지음 / 김석근 옮김 / 통나무 펴냄, <면역의 의미론> 다다 도미오 지음 / 황상익 옮김 / 한울 펴냄, <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지음 /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펴냄

이 네권의 책은 질문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올랐던 목록이다. 그렇다고 매일 탐독하는 책들은 아니다. 들뢰즈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들은 의미를 찾는 것과는 무관한 하나의 기계에 가깝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 책들이 내게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말하는 것일 터이다. 말하자면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책들이다.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영화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여전히 어렵다. 세르주 다네가 신문의 글쓰기에 대해 말하듯, 할 수 있는 말은 아직까지 이런 식이다. “내일은 영화에 대한 생각이 보다 정리되는 날들이 올 것이다.” 영화에 대한 일종의 기후학적 사유가 있다. 미셸 세르의 <헤르메스>의 첫 구절이 그렇게 내게 다가왔는데 그건 구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폭풍우를 만난 것 같은 야단법석과 아우성들. 이른바 세계의 체계 바깥에서 커다란 무질서가 화려하게 다가왔다. 언제나 저기, 별이 총총한 바람층에 흩어진 구름으로 인해 나는 시간을 허비해왔다. 대기 현상으로 인해.” 세르는 구름 속에서 사유하는 듯이 보이는 모든 이는 구름 잡는 이야기를 한다고 의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영화에 대해 말하는 이도 종종 같은 의심을 받는다. 구름은 유동한다. 거기에 사물, 육체, 전언, 의미, 질서 정연한 구조 또는 심지어 체계가 있다 해도, 이것들은 오직 떼섬의 형태를 띤다. 무정형의 광막한 대양 위에 흩어진 소프라데스(에게 해에 있는 군도) 같은 것이다. 세계는 그런 무질서의 유별난 대기 현상이다. 영화도 그렇다. 구름은 영화 속에도 있다. 존 포드의 웨스턴에서, 드레이어의 영화에서, 스트라우브-위예의 영화에서, 혹은 구스 반 산트의 영화에서 구름을 보지 않고 어떻게 영화를 말할 수 있을까.

자기와 비(非)자기

대기학 혹은 자연학에 대한 작은 관심은 90년대 중반 에이젠슈테인에 대한 논문을 쓰던 시절에 형성되었다. 야마다 게이지의 <주자의 자연학>에 손이 갔던 것도 그즈음이다. 동양학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대략 1200여개의 유동적인 숏이 움직여 완성되는 영화들에서 어떤 흐름의 통제를 알고자 했기 때문이다. 내러티브 분석은 흥미롭지 않다. 거기에는 도식을 타고 흐르는 어떤 힘이 상실되어 있고 정서와 감각들이 배제되어 있으니. 비교적 잘 다뤄지지 않는, 에이젠슈테인의 후기 저작인 <무관심하지 않은 자연>을 <주자의 자연학>과 함께 놓고 읽었었다. 에이젠슈테인의 이 저작은 무엇보다 시각론, 풍경론으로 구상되어 있다. 그는 무성영화기의 영화에 나타난 풍경을 ‘눈의 음악’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풍경은 영화에서 가장 자유로운 요소로 이야기적 정보에서 해방되어 정서, 감정적 상태, 정신적 체험을 전달하는 가장 유용한 요소다. 기분이나 정서는 언어적 발화가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본래라면 음악만이 전달 가능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풍경이 그런 기능을 한다. 이러한 예가 가장 적절하게 표현된 것이 <전함 포템킨>에서의 (유명한 오데사 계단 학살장면이 아닌) 오데사의 안개 시퀀스다. 이 장면의 요지는, <주자의 자연학>의 논의를 빌려 말하자면 감응에 관한 것이다. 세계가 단 하나의 작용(자연의 흐름)과 반응(인간의 저항)에 있다는 것으로, 여기서 반응이란 조용히 지켜보는 것, 마음으로 느끼는 것(내감)이다. 그런데 감응은 인과 관계가 아니다. 가령 이런 표현들. “하늘이 흐려졌다. 혹은 비가 내린다. 그러면 아픈 사람들은 괴로워한다.” 이러한 기후와 병과의 관계가 감응이다. 영화는 그런 기후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영화의 이미지가 어떻게 자연의 흐름과 인간의 느낌을 공명하게 하면서 감응을 만들어내는지, 그것이 여전히 궁금하다. 주자는 만년의 10년 동안 많은 시간을 자연에 관한 사색과 연구에 바쳤고, 자연적 세계를 구성하는 물적 토대를 탐구하려 했다고 하는데, 에이젠슈테인의 후기 작업 또한 그러하다.

다다 도미오의 <면역의 의미론>은 면역학을 다루는 책이다. 면역은 외부에서 침입하는 미생물에 대해 항체를 만들고, 그것을 제거하여 자기(self)의 항상성을 지키려는 현상이다. 간단한 사례. 만약 메추라기에 닭의 뇌를 이식하면 메추라기는 자기를 무엇으로 인식할까? 혹은 메추라기의 뇌를 가진 병아리는 어떻게 울까? 이러한 다소 엉뚱한 실험이 제기하는 문제는 ‘자기’란 무엇이고 ‘비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그 결과는 흥미롭다. 어제까지 ‘자기’였던 것이 오늘은 ‘비자기’가 될 수도 있다. 각각의 시점에서 ‘자기’의 동일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진짜 연속성을 가진 ‘자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는 이런 면역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사실 ‘자기’가 아닌 ‘비자기’의 신체를 보는 경험이다. 영화를 볼 때의 나는 ‘나의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신체의 상태에 놓인다. 자기의 자명성을 잃은 신체, 나의 이상함, 너무나 이상한 나 혹은 안과 밖의 변경지대를 통과하는 나. 문득 떠올렸던 생각들. 이를테면 우리는 뱀파이어 영화들에서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피를 필요로 하는 뱀파이어가 타자를 자신의 신체에 내재화하는 감미로운 공포에 대해 말해야 한다(클레르 드니의 <트러블 에브리데이>). 혹은 장 뤽 낭시의 <침입자>를 각색한 클레르 드니의 세계. 철학자 낭시는 심장이식수술 뒤에 신체가 자기성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심장을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배제해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면역작용을 억제하는 노력을 해야만 했다. 말하자면 ‘나’의 신체의 ‘자기성’과 ‘고유성’을 희박하게 해야만 그는 살아갈 수 있다. <금요일 밤>의 낯선 이와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클레르 드니는 <금요일 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낯선) 남자가 여자의 차 안으로 들어가려는 행위에는 ‘침입’이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침입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두려움이라기보다는 낯선 것을 받아들여 무언가를 얻는, 그러니까 긍정적인 의미의 두려움이다. 나는 두려움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싶지 않았다. 삶에는 늘 그런 침입이 있다. 사랑 또한 그런 침입의 일종이다.”

보여지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이제, 마지막 남은 한권의 책. 이 책은 주제의 탐닉보다는 영화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다.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 투르니에는 거의 반세기 동안 시골에서 살아온 자신의 내면적 상태 같은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수공업자들과 농사꾼들에 비유한다. 즉 이 책은 ‘지난날의 소박한 시골 귀족들이 추수, 아이들의 출생, 결혼, 초상, 날씨의 급변 등을 적어두곤 했던 ‘출납부’처럼 쓰인 일기’ 같은 것이다. 그는 밖에서 마주친 사물들, 동물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보다 항상 더 흥미롭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태도. ‘너 자신을 알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은 그러므로 “의미없는 명령으로, 사실 우리는 창문을 열고 문 밖으로 나설 때 비로소 영감을 얻게 된다”.

영화는 그런 세계의 풍부함을 담아내기 위해 카메라를 사용하는 예술이다. 영화의 미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세계가 복잡하고 풍부한 것임을 알게 해주는 데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런 식으로 영화를 생각한다. 그는 40살을 넘기면서 생각해보니 20년 정도를 살아온 젊은이들의 자기다움이란 게 별것 아닌 것이라 생각된다 말했었다. 세상의 풍부함을 어떻게 마주보는지, 세상의 풍부함과 만나는 도구로 눈과 귀를 구사해 어떻게 작품을 만들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사실 작가나 예술가들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가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스크린 위에, 우리의 눈앞에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바깥 세계의 풍부함을 감지하는 것. 비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