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여자들을 욕먹을 걱정 없이 맘껏 훔쳐볼 때면 여자로 태어난 게 참 다행이다 싶다. 여성을 향한 시선 뒤에 숨은 욕망의 음험함에 대해,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관대한 해석을 내려주니 말이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속편한 훔쳐보기는 스크린 앞이 최고다. 육체적 미학에 있어 이 시대의 정예부대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진열되어 있는 데다 영화란 본질적으로 훔쳐보기를 위한 매체가 아니던가? 어두운 곳에서 나를 노출시키지 않고 대상을 맘껏 응시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니. 하지만 여성 관객으로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아분열을 야기한다. 나도 그녀들을 즐겨 보지만 그녀들이 즐겨 보여지도록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불편하기 때문이다.
대중에 노출된 여성의 육체는 아름답지만 위험하고 한편으로는 전복적이다. 신현규의 <기생, 조선을 사로잡다>는 ‘근대’와 함께 도래한 조선의 대중사회에서 공공의 여성으로 소비되었던 ‘기생’들의 면면이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다. 소리, 무용, 기악 등 전통 예술의 전수자들이었던 그들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신문물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이는 대중 오락계의 총아이기도 했다. 1920년 프로야구를 홍보하러 온 미국의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접대하기도 했고 흥행이 저조한 기차여행의 홍보물로 사용되거나 파리 만국박람회에 조선 홍보상품 자격으로 출품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들은 ‘근대’에 대항하여 조선이 내놓을 수 있는 ‘전근대’적 미덕인 동시에 조선의 ‘근대’적 가치와 산물을 가장 효율적으로 소비하도록 만드는 촉매제였다. 무엇보다도 ‘기생’은 근대 체제에서 가장 문제적으로 부각된 여성의 육체에 닥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온갖 예능 기술의 사관학교식 훈련을 받았던 그들은 최초의 신식 모델, 영화배우, 가수가 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육체로부터 단절을 상징하는 ‘단발’을 감행하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잡지를 발간하여 ‘기생제도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영아의 <육체의 탄생>은 근대의 도래 이후 권력이 우리의 육체를 어떻게 통제하고 훈육했으며 또 기술과 지식을 통해 질병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는지를 고찰한다. 특히 ‘신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육체가 남성의 시선과 시선 안에 내재된 권력에 위협받고 훼손되었는지를 일러준다. 그러나 기생은 결국 자신을 기생으로 만들었던 사회의 부조리를 발견했던 것처럼 신소설 속 여성들은 드디어 고전소설 여성들이 갇혀 있던 내실(內室)로부터 탈출/축출되었다. 세계로 나온 여성의 육체가 위험해지는 과정을 그린 서사는 한편으로는 기존 규범을 준수하라는 경고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롭게 도래한 사회에 대한 반영이기도 했다.
이 책들은 현재도 진행 중인 육체에 가해진 속박과 질곡의 원형을 보여준다. 표현수위가 높아졌지만 해방이 온 것이 아니요, 사고의 틀이 달라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스크린 위에는 여전히 여성의 육체들이 규율과 통제의 대상으로 전시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여성도 시선의 주체로 기입되었고 남성의 육체도 빈번하게 전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생물학적 성별은 시선의 권력을 해석하는 데 더이상 유효한 틀도 아니다. 주디스 버틀러의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는 이제 진영은 남/녀가 아니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쟁점을 따라 각개전투로 벌어진다는 걸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