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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분열만이
김선(영화감독) 2013-04-09

<분자혁명> 펠릭스 가타리 지음 / 푸른숲 펴냄

일단 글이 어렵다. 그래서 멋있다. 책을 펴보자. 엄청난 용어들이 다발로 튀어나온다. 분자, 역능(puissance), 욕망하는 기계, 횡단, 분열, 유목민, 무엇보다 소수. 이 단어들은 소위 후기 구조주의라 일컬어지는 라캉, 푸코, 알튀세르, 베냐민, 라이히(그렇다. 성적 에너지가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그 미친 정신분석학자!)의 개념들을 확장해서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긴 개념이라고 한다. 그 어려운 책 <천개의 고원>으로 유명한 들뢰즈도 비슷한 단어들을 나열한다. 가타리는 그 책의 공동저자이기도 하다.

어려워서 멋있는 것도 있지만, 단어들만 모아놓고 자세히 살펴보면 혁명적으로 보인다. 전체가 아니라 부분, 인간이 아니라 기계(유물론적 관점에서), 정주행이 아니라 횡단, 정착민이 아니라 유목민, 다수가 아니라 소수. 뭔가 삐딱하다. 그렇다. 가타리가 들뢰즈와 함께 (혹은 따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미시정치학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힘을 거대한 전체로 사유하기보다는 미시적인 수많은 분열하는 분자들로 사유하는 것. 분열되면 될수록 소수자들-유목민들은 힘- 역능- 을 얻는 것.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가 아니라 분열하라라니.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뒤로 쓰러질 판이다. 물론 웃으면서 쓰러지시겠지.

작가 얼굴도 정말 소수처럼 생겼다. 지저분한 머리에 삐죽 올라간 눈이며 똑똑하게는 보이는데 말은 붙이고 싶지 않은 덕후스러운 이목구비. 아마도 가타리에게는 ‘소수되기’가 필연적이었나 보다. 가타리는 이것 말고도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여러 가지 ‘미시적’ 운동을 제시한다. 이 또한 완전 멋있다. ‘분열하기’는 물론이고, ‘여성되기’, ‘어린애되기’, ‘동성애자 되기’, ‘소수되기’ 등등. 단지 혼자 지내란 말이 아니다. 최대한 빨리 신속하게 ‘운동’해서 ‘속도’를 증가시키란 얘기다. 덩치를 줄이고, 즉 나의 주체성을 분열시키고, 시야도 하나가 아니라 수백, 수천개로 증식시키고, 방향성도 일방향이 아닌 다방향성으로, 욕망도 하나가 아니라 수만 가지 욕망을 지녀야 한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허무맹랑해서 멋있는 것도 있지만, 이제까지의 전체가 중요하고, 큰 놈이 더 좋은 거고, 돈 많이 벌면 좋은 거라는 판에 박힌 소리보다는 좀더 혁명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무엇보다 영화쟁이로서, 영감 폭발하는 챕터는 바로 ‘영화는 소수예술이어야 한다’이다. 가타리는 특히 이 챕터에서 특유의 정신분열적 글쓰기가 심해져서(혹은 번역이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흠흠)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듣기 힘들다. 하지만 명문장들이 분열적으로 마음에 꽂히곤 하는데, “영화의 하찮은 기적은 우리를 고아로, 독신자로, 기억상실자로, 무의식적이고 영원하게 만든다… 그래서 영화는 실존을 전복시킬 수도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하지만 엄청난 철학이 실은 심플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하찮은 기적’ 같은! ‘실존의 전복’ 같은!

요는 이렇다. 영화는 무의식의 예술이고, 무의식은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영화 만드는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영감을 주는 문장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지금 곡사가 제한상영가 행정소송 중인 영화 <자가당착>의 영어제목인 <Self Referential Traverse>는 이 책에서 따온 것이다. Traverse는 횡단이란 뜻으로 가타리가 주장한 분열적 운동을 지시하는 단어다. 폼 좀 잡아보려고 지었으나 아무도 안 알아주기에 이 자리를 빌려 밝혀둔다. 그래, 폼 그만 잡아야겠다.

더불어 이 책 <분자혁명>을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님들께 권해드리고 싶다. 분열해야 세상이 아름다워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공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