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늘도 심각한 영화 몇편을 보았으며, 그에 부응하듯 심각한 고민을 몇번 했으며, 그에 근거해 언젠가 배운 몹시도 현학적인 개념 몇개를 떠올려보았으며, 그를 인용할 수 있는, 남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할 수 없는, 최소한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생각 좀 해볼 수 있는, 전대미문의 시나리오와 이미지를 생각해냈다. 그래, 이게 성장이다… 흡사 단세포생물에서 고등생물로, 그 뇌의 주름이 더욱 촘촘해지고 신경계가 더 복잡해지듯이, 난 오늘 하루 성장한 것이다.
…라고 페이크. 성장은 신화였을지도 모른다는 공허감이 갑자기 밀려온다. 어려운 길로 시나리오가 그려지고, 좀더 복잡한 그림으로 이미지가 진화해나갈 때, 그리고 그와 함께 공허가 밀려오는… 이러한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마침 난 몇권의 만화책을 비치해두었다, 주도면밀한 복화술 같으니라고. 기억을 더듬어보면 모두 다 빛을 발한다. 길창덕, 오원석, 박수동. 그래, 이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 내가 돌아가봐야 할, 내 최초의 ‘영화’는 박수동이다.
가장 유명한 <고인돌>은 그냥 패스. 이름을 담는 것만으로도 입에서 향기가 피어오를, <번데기 야구단> <5학년 5반 3총사> <오성과 한음>은, 너무나 많이 봐서 페이지가 닳고 닳아, 이제 거의 떨어져나갈 것 같은 상태이므로 패스. 그래, 좀더 후기작이자 조금은 덜 알려진 ‘숨은 명작’, <홍길동과 헤딩박>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초딩 특유의 매력
박수동의 작품에는 초딩 냄새가 진동한다. 아니 국딩이라고 해야겠다. 박수동 화백 자신이 국민학교 교사 출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그는 만화가의 꿈과 배고픈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다 교편을 잡았다 놓기를 수어번 반복하였다). 그의 필체 자체가 이미 국졸이다. 이것은 길창덕의 덜렁대는 깜찍함도 아니고, 오원석의 교훈적 깔끔함도 아니고, 이두호의 거친 농담(濃淡)도, 허영만의 섬세함도 아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국딩스러움이다. 마치 국민학생이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제멋대로 끼적대는 것처럼, 몽당연필로 어설프게 그려진 윤곽선들이 박수동의 캐릭터와 배경을, 흔들흔들 그려내고 있다(춤으로 치자면 그 언젠가 국딩 때 따라 추었던 김완선이나 박남정의 바로 그 흔들흔들이다).
내가 공허폭탄을 맞기 직전까지만 해도, ‘알레고리’라고 거창하게 불렀던 캐릭터들 사이의 내러티브 구조 또한 여전히 흔들흔들 국딩스럽다. 박수동의 ‘알레고리’는 언제나 국민학교에 머문다. “뿡빠라 빵빵 삐약삐약”(그대로 옮겨본다) 풍악을 울리며 탐관오리들이 뱃속을 채우고 있으면 백운도사로부터 이제 막 하산해도 좋다는 말을 들은 초능력자 홍길동과 그의 사이드킥(배트맨으로 치면 로빈 같은) 헤딩박과 같은 어린이들이 그들을 골탕 먹인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단순함. 나쁜 어른들과 착한 어린이.
처단 혹은 단죄란 골탕이다. 여기에 박수동의 매력이 있다. 박수동의 작품에서 나쁜 어른들은, 이미 흔들흔들 몽당연필선들에 의해 윤곽지어짐으로써 존재하듯이, 착한 어린이들에게 골탕 먹을 준비가 되어 있다. 착한 어린이들이 하는 천진난만한 짓거리에 속아주는 것인 양 그들은 어느새 그들의 권좌에서 스스로 폐위하여, 또 다른 어린이가 되어 있다. <홍길동과 헤딩박>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챕터를 하나 예로 들어보면 홍길동은 복싱시합을 해서 포졸들을 “케이오우”시키고, 헤딩박은 헤딩으로 사또 얼굴을 찌그러뜨려 “옥떨메”로 만든다. 화가 난 옥떨메는 홍길동을 헤딩으로 복수하여 홍길동도 자신과 같은 옥떨메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방과 함께 냅다 튀고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옥떨메”라고 놀리자 이방에게 “옥떨메”가 무슨 뜻이냐고 묻고, 이방이 낄낄거리며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라고 말하자 도망가다 말고 이방을 때리다가 홍길동에게 결국 잡힌다…. 무엇보다 상황을 장식하는 것은, 나쁜 어른들이 그 상황에 참여하는 방식, 즉 코러스다. 옥떨메 사또가 당하고 있노라면, 이방은 이를 사진 찍는다. 혹은 포졸이나 산적이 “빅토리”를 외치면서 응원한다. 사실 한컷 한컷이 정성스럽고도 교묘하게 녹아 있는 코러스는 국딩스러움의 절정이다. 왜냐하면 이 코러스는 말 그대로, 이 세계의 학예회이기 때문이다. 홍길동이 산적들을 자신의 부하로 만들 때, 그는 단상에 올라가 조회를 한다. 그리고 홍길동이 포졸들에게 내리는 벌은, 손들고 구구단 외우기이다. 세계의 국딩화… 이것이 홍길동과 “왕빠우 도사”와의 대결에서 어른 백성들이 “브이.아이.시.티.오.알.와이. 빅토리 빅토리”를 응원할 수 있는 자격이다.
박수동의 권투는, 진짜 링 위에서 피터지는 권투가 아니다. 그 언젠가 국딩인 우리가, 세계챔피언을 따라해본답시고 학교 복도에서 자기들끼리 하던 바로 그 권투놀이다. 김일 선수의 헤딩이 아니라, 그를 국딩들이 따라하던 바로 그 헤딩이다. 박수동에게 사회악이란 옥떨메다. 천재는 천하에 재수 없는 놈, 바보는 바다의 보배란 것(또 뭐가 있었을까? 아붕볼?)을, 기억하는 영원한 국딩만이 이러한 박수동의 전일적 알레고리에 웃을 수 있다.
성장은 허세일 뿐
박수동의 캐릭터, 이야기, 그리고 알레고리엔 국딩만이 향유하는 평등성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권력의 평등이 아니다. 권력은 국민학교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놀이의 평등이다. 악이란 없다. 악역만이 있다. 그들은 언제라도 어린이로 흔들흔들 몽당연필 퇴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임시적 어른들, 몽당어른들이다. 그럼으로써 놀이는 세상을, 더도 덜도 없이 탁본 뜬다. 국딩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웃음과 눈물이다.
나는 혹시나 하고, <홍길동과 헤딩박>에 부록처럼 실려 있는, <최신판 흥부와 놀부>를 내친김에 탐독한다. 고백하건대, 난 눈물을 흘린다. 돌아보니 매번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이처럼 단순한 것이었다(영화도 그랬었지). 난 애초의 자부심을 파기하기로 한다. 복잡함은 어른의 허세였다. 또한 성장은 예술이나 창조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반대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국딩스러움, 유치함이다.
난 홍길동, 헤딩박, 곱단이가 영원한 우정을 간직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들이 암행어사가 되어서 언제라도 돌아와 “가징마” 둔갑술로 날 구해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반대로 나는 이번 해에, 어떤 영화가 오스카상을 받을지 확신하지 못한다. 홍길동과 헤딩박이 나에게 주는 확신 앞에, 그것은 한낱 미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