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에서 극적인 상황과 양식적인 표현을 걷어낸다면 뭐가 남아 있을까?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에서 추측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나 맥락이 충분했던가? 같은 한국인이니까 읽어낼 수 있는 뉘앙스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JTBC 드라마 <세계의 끝>을 보면서 깨달았다. 극적인 상황의 일차적인 감정에 치중하다 보니 삭제되고 또 눈감게 되었던 리얼리티의 쾌감을. 배영익의 소설 <전염병>을 원작으로 한 <세계의 끝>은 북태평양 베링해에서 명태잡이 조업을 하던 원양어선 문양호가 귀환 도중 기관고장으로 인해 침몰하고 선원 어기영을 제외한 129명의 선원이 실종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뒤 어기영과 접촉한 인물들이 차례차례 원인 모를 바이러스로 죽어가고, 질병관리본부는 월면을 닮은 괴바이러스를 ‘M바이러스’라 명명하고 감염자를 추적한다.
<세계의 끝>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이러스 재난에 대응하는 절차와 시스템 안의 인간을 대단히 성실하게 짚는 점이다. 강주헌(윤제문)을 팀장으로 하는 역학조사, 검체추출, 서류절차 등에 꽤 긴 시간을 할애해 전문가들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질병관리본부와 공조하는 지방경찰, 소방방재청, 검역 등 또 다른 시스템 안의 구성원들을 각자의 입장과 경험에 충실하게 그려낸다. 각 인물들의 직업과 신분, 그리고 관계나 발언하는 공간 등은 모두 그들의 행동을 도출하는 조건과 맥락이 된다. 그리고 그 말과 행동의 뉘앙스가 꽤나 한국적이다. 예를 들어, 질병관리본부 센터장 박주희(윤복인)의 남편이며 외부 전문가팀인 김희상 교수(박혁권)는 비상대책회의 자리에서 항체전문가 윤규진(장현성)을 견제하기 위해 이론과 임상의 차이 등을 거론하며 장황한 문어체로 반대의 뜻을 밝히는 사이사이에 ‘본부장님의 입장’을 생각해줘야 한다거나 윤 박사가 자신의 ‘오랜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우려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조직의 윗사람을 거론하거나 자신이 개인적인 친분을 초월한 공적인 인간임을 어필하는 화법으로 연막을 치고 열등감을 숨기는 김희상은 박주희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한마디를 덧붙인다. “회의장에서 내가 당신 공격한 거 그거 다 당신 위해 그런 거야. 내가 그 정도 해버리니까 정 본부장이 당신한테 아무 말도 못했잖아.”
가명을 쓴 어기영을 진찰했던 부산의 개인병원 내과의는 방역복을 입은 윤규진이 ‘청진은 해보셨냐’고 질문하자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은근 반말을 섞어쓰며 답한다. “청진? 거 요즘 젊은 의사들 청진하는 거 우습게 본다던데. 환자 말만 듣고 처방전 내릴 때까지 딱 3분이라며?” 극중 분량으로 치면 ‘의사2’ 정도의 역할인데도 한 동네에서 오래 진료해온 베테랑 개업의로서 본인의 진료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 그리고 억하심정이 튀어나온다. 윤규진이 내민 어기영의 사진과 M바이러스 감염증상을 읽어보고 보태는 말도 걸작이다. “실물이 낫네.” “어허, 이 친구가 지 몸에 손 못 대게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네. 우리 아들보다 낫다.”
<세계의 끝>은 다른 드라마에서 아주 작은 역할로 스치는 인물들까지 제각기 화면 밖의 시간들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의 밀도를 부여한다.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 업인 정적인 자들이 주인공이니 극의 서스펜스는 그들이 역학조사와 연구과정에서 찾는 장소나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도 리얼리티와 개연성에 치밀한 안판석 감독의 드라마답다. 한국 드라마가 주인공의 감정을 위해 다분히 편의적으로 움직이는 세계에 특화되어 있다면, <세계의 끝>은 거꾸로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관성(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에 따라 돌아가는 한국사회의 각 지점들을 바이러스가 흔들고 그곳에 도착한 주인공들은 관찰자로, 또 인간적인 갈등 앞에서 선택과 결정의 당사자로 움직인다. 막장과 복수가 공회전하는 드라마판에 번쩍 하는 섬광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