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때 아버지가 나를 국립중앙박물관에 데려간 적이 있다. 당시에 박물관은 덕수궁 석조전을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분위기가 한적했다는 것 빼고는 거기서 뭘 봤는지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단 하나의 기억이 있다. 그것은 박물관에 전시된 석조 불상의 무릎 위에 수북이 쌓여 있던 지폐와 동전이었다. 그 영상이 아직까지 머리에 생생한 것을 보면,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매우 기이하게 여겨졌던 모양이다.
세계의 개시와 붕괴
오늘날 우리가 ‘작품’으로 감상하는 조각들은 대부분 과거에는 종교적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신전이나 사원과 같은 건축의 일부가 되어 그 안에서 종교적 기능이 요구하는 장소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근대 이후 한편으로는 보존의 필요에 따라,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의 목적으로 신상들이 박물관으로 옮겨지면서, 조각들은 ‘지금, 여기’라는 현전의 체험을 매개하던 아우라를 잃고 한갓 ‘작품’으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이 기능의 전환을, 발터 베냐민은 ‘예배가치’에서 ‘전시가치’로의 변화로 설명했다. 하지만 신상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아우라’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각에는 한때 그것이 가졌던 종교적 기능의 흔적이 집요하게 들러붙어 박물관에서조차 아우라를 뿜어낸다. 물론 이 아우라는 종교적 성격의 것이 아니라, 미적인 성격의 것이다. 신은 없어도 신성한 분위기는 남은 이 상태를 베냐민은 ‘부정신학’이라 불렀다. 이 아우라적 지각에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이 바로 사진과 같은 복제기술이다.
베냐민과 달리, 하이데거는 아우라의 붕괴를 한탄한다. 가령 고대 그리스의 조각들은 그때 그 자리에서 한 역사적 민족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하지만 박물관에 옮겨지는 순간, 이 세계-개시(開示)의 기능은 사라지고 신상은 한갓 미적 감상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의 불상들도 아득한 과거에는 민족적 삶의 세계를 구축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물관에서 그것들은 미적 감상의 대상일 뿐이다. 이 근대의 예술문화 속에서 한때 불상이 우리 민족에게 열어주었던 ‘세계’는 붕괴한다.
회화도 다르지 않다. 회화 역시 과거에는 건축의 일부로서 성당이나 수도원의 벽에 그려졌다. 하지만 화판화(‘타블로’)가 등장하면서 회화는 ‘모바일’ 매체가 된다. 운반 가능해진 회화는 원래 그것이 속하던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다. 이 탈맥락화를 통해 회화는 종교적 기능을 잃고 새로이 미적 기능을 획득한다. 예배가치는 전시가치로 전환하고, ‘성상’의 종교적 아우라는 ‘작품’의 미적 아우라로 대체된다. 물론 사진이라는 복제기술은 이 마지막 아우라마저 파괴해버린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에 있는 어느 수도원 식당의 벽면에 그려졌다. 그 성상으로 인해 수도사들은 식사를 할 때마다 마치 예수의 마지막 만찬에 초대받은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최후의 만찬>이 만들어내도록 의도된 분위기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 작품을 대개 화집에 사진으로 복제된 상태로 본다. 이때 작품이 연출하는 분위기는 파괴되고, 우리는 그것을 순수 미적 현상으로, 말하자면 원근법이 적용된 르네상스 ‘양식’의 대표적 작품으로 지각하게 된다.
다시 처음의 그 기억으로 돌아가보자. 박물관 불상의 무릎 위에 쌓인 지폐와 동전은 불상이 박물관에 들어와서까지도 여전히 종교적 기능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0년 당시만 해도 한국인들의 지각은 여전히 아우라적이었다. 다시 말해 급속한 산업화가 이루어지던 그 시절, 한국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근대화, 산업화 이전의 지각방식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이미 미적 대상이 된 불상에 여전히 종교적 감정을 투사했던 것이리라. 물론 오늘날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미국의 비평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조각에서 ‘현대성’(modernity)이란 조각이 건축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자립적, 자족적 작품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일찍이 한스 제들마이어 역시 예술의 자율화, 즉 각 장르가 건축에서 떨어져 나와 서로 아무 연관도 없는 자족적 작품이 되는 것을 ‘현대성’의 특징으로 꼽은 바 있다. 크라우스에 따르면, 현대조각의 역사는 조각이 일체의 외적 맥락에서 떨어져 자립적 존재로, 다른 장르의 요소들을 배제하고 순수한 존재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조각은 이 모더니즘의 논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대지예술’(land art)이나 이른바 ‘장소 특정적’(site specific) 설치예술은 조각을 박물관이라는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박물관 밖의 특정한 장소에 갖다놓고 거기서 모종의 분위기를 연출하려 한다. 이렇게 조각을 박물관이라는, 삶에서 분리된 공간에서 끄집어내어 다시 박물관 밖의 삶의 현장의 맥락에 재배치한다는 의미에서 대지예술이나 장소 특정적 조각은 현대성의 기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셈이다.
크라우스에 따르면, 바로 이 장소 특정성이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의 조각은 모던(modern)과 모던 이전(premodern) 조각의 변증법적 종합으로 나타난다. 즉 그것은 조각의 자율화와 자립화에 배치된다는 의미에서 모던 이전의 특성을 띠나, 그 전근대성이 더이상 종교적 기능과는 상관없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모던하다. 장소 특정적 작품에는 모종의 ‘부정신학’이 있다. 즉 그 ‘장소’에 더이상 신은 존재하지 않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분위기가 존재한다.
세속적 신전
베를린에 유학 중이던 90년대 중반, 크리스토가 베를린에 있는 제국의회 건물을 포장한 적이 있다. 이 건물은 통일 이후 수도가 베를린으로 이전함에 따라 새로이 독일의회의 건물로 사용되기 위해 막 보수공사를 마친 상태였다. 보수공사가 완료되고, 의회가 이전해 오기 전까지 잠시 비어 있는 기간을 이용한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이 기획에는 물론 정치적 함의가 있다. 건물에 포장을 씌웠다가 벗기고 나니 과거 독일제국의 상징이었던 건물이 새로운 민주적 독일의 상징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당시 많은 이들이 이 기획에 반대했고, 의회 내에서도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물론 한 역사적 민족의 상징물이 한갓 예술의 재료로 사용되는 데에 대한 반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건물의 포장이 완료된 뒤 이 비판의 목소리는 쑥 들어갔다. 베를린에 사는 시민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 사는 독일인들은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에게 크리스토의 작품은 잊을 수 없는 장관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작품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이 거대한 예술적 프로젝트에 만족을 표했다.
흥미로운 것은 TV 뉴스 프로그램이 인터뷰한 어느 여인의 반응이다. 그녀는 포장된 제국의회 건물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눈물이 어떤 종교적 감동에 가까운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만은 분명하다. 바로 그것이 장소 특정적 작품이 만들어내는 ‘아우라’의 효과이리라. 하지만 신이 없는 신성함이라는 의미에서 장소 특정적 작품이 연출하는 아우라는 부정신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