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돈의 화신>은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흔한 복수극으로 출발하는가 싶더니 이내 적대하는 인물간의 선악을 흐려놓고 감정이입 이상의 생각을 요구하며, 불안의 씨앗을 던져놓은 채 능청스럽게 딴 이야기로 돌려 혼을 빼놓는다. 정극과 코미디를 오가는 건 예사. 치정, 복수, 패러디, 법정, 수사, 추리, 스릴러, 세태풍자 등 다양한 소재의 거침없는 접붙이기에 거듭 놀라다보니 벌써 이야기의 전환점인 12회까지 왔다. ‘사극 빼고 다 하는구나’ 싶던 차에 주인공 이차돈 역의 강지환은 소복 차림에 사극 머리를 하고 외치더라. “나는 조선의 국모다!”
물론 그는 국모가 아니다. 여기저기 뒷돈을 받아 챙기다 들통난 전직 검사 이차돈이 변호사 개업 뒤 사설요양원에 강제입원된 박기순(박순천)의 100억원대 상속건을 수임하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계책을 짜낸 것. 드라마 <명성황후> 패러디야 수도 없이 봤고 강지환의 여장은 예고편에서 흘린 장면이라 크게 웃을 일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도 <나 가거든>의 처연한 멜로디에 먼 곳서 달려오는 앰뷸런스의 아스라한 경보음이 얹히면서 빗장이 풀린 웃음은 남자 간호사와 이차돈의 몸싸움이 일단락되고 앰뷸런스가 떠나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리고 국모님이 뛰쳐나오는 데서 다시 터지고 말았다. 요양원에 잠입하는 것이 목적이니 잡혔으면 끌려갈 일인데도 국모 상황극에 몰입한 것에서 이차돈이란 인물의 캐릭터가 나온다. 그리고 악행을 저지르는 요양원 원장과 대면한 차돈이 경멸어린 표정과 낮은 목소리로 “무엄하구나. 그 천한 면상을 치우지 못할까”라고 말할 때 코미디에서 출발한 설정은 정극으로 위화감 없이 꿰어진다.
깔아둔 설정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극본을 바탕으로 캐릭터가 매 상황과 대상에 충실하게 반응해 각 신을 연결하는 것은, 누구나 알 만한 패러디가 삽화처럼 끼어들어도 본래 극의 긴장을 잃지 않도록 하는 비결이며, 다양한 장르에 희극과 비극의 정서가 중첩되는 <돈의 화신>이 갖춘 매력이다. 환자를 ‘집중 치료실’로 데려가 전기충격을 가하고 그 비명을 지하병동의 스피커로 연결해 환자들의 정신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설비가 요양원을 무시무시한 곳으로 만드는 설정이라면, 원장은 그 소리를 덮는 클래식을 들으며 간식으로 번데기를 먹고 있고, 환자간 대화가 금지되는 지하병동의 차돈은 집중치료실의 스피커를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난동을 피운다. 비명과 신음이 흘러나오던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결연한 표정으로 “계란 프라이는 왜 안 주냐!”며 상을 엎는 차돈의 모습에 웃음과 공포가 겹친다.
그리고 캐릭터가 각 상황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것은 주인공 외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부동산 재벌 이중만(주현)을 죽이고 유산을 가로챈 뒤 부인 박기순에게 살인누명을 씌우고 그녀가 출소하자 이번엔 요양원에 감금한 지세광(박상민) 검사는 극 내내 진중하고 심각한 톤을 유지하는 인물이다. 원장이 지세광과의 독대에서 박기순을 빌미로 돈을 더 뜯어내려 하자 지세광은 위협적인 저음으로 외친다. “아가리 닥쳐. 너 같은 버러지 새끼 상대해주니까 내가 만만해 보여?” 여기서 ‘버러지’라는 단어선택은 지세광이 번데기를 즐겨먹는 원장을 직접적으로 모욕하는 것일 수도, 앞에서 번데기를 먹고 있는 이미지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연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후자가 더 맘에 들지만) 뭐가 되었든 눈앞의 상황에 제대로 응하고 있는 셈.
굳이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끌어내 이야기한 이유는 대단히 빠른 전개에 많은 가지가 뻗어가는 <돈의 화신>이 작은 장면 하나도 허투루 풀지 않음을 전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자이언트>부터 내리 세 작품을 함께한 장영철, 정경순 작가와 유인식 PD는, 믿어도 괜찮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