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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링컨이 있다
장영엽 2013-03-19

대니얼 데이 루이스 배우론

2011년 5월, 스필버그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에게 우편물을 한통 받았다. 그 우편물 안에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링컨의 재취임식 연설문을 직접 낭독한 것이 담긴 녹음기가 들어 있었다. “그건 링컨의 목소리였다. 그의 자손 세대가 추측해낼 만한 우렁찬 목소리가 아니라 마치 그를 직접 만나본 사람이 낼 수 있을 법한 목소리였다.” 스필버그는 우편물을 받자마자 대니얼 데이 루이스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구시죠?”

<링컨>을 보며 우리 모두가 던지게 되는 질문을 2년 전 스필버그도 했던 것 같다. 스크린 속에서 링컨처럼 말하고 링컨처럼 걸으며 링컨처럼 사람들을 회유할 줄 아는 저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매 작품 자신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온전히 캐릭터의 모습을 채워넣기로 유명한 대니얼 데이 루이스에게 이 질문은 놀랍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데이 루이스에게 그 어느 때보다 쉽지 않은 과제였음은 분명하다. <링컨>은 수십명이나 되는 주요 등장인물이 오직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춤을 추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선 무도회 같은 작품이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자 뛰어난 정치인,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뒷거래도 서슴지 않는 모략가, 일상에선 조금 굼뜬 남자였으며 아내와 아들에게 맥을 못 추는 가장의 모습이 모두 영화 속 링컨의 것이며, 데이 루이스는 매 장면 연기 파트너를 교체해가면서 인간 링컨의 생애 마지막 4개월을 충만히 보여주려 노력한다. <뉴욕타임스>는 이전에 링컨을 연기한 바 있는 다른 경쟁자들과 데이 루이스의 연기를 비교하며 이런 글을 남겼다. “그는 그리피스의 1930년작 <에이브러햄 링컨>의 월터 허스턴처럼 무기력하지 않으며, 존 포드의 <젊은 날의 링컨>(1939)의 헨리 폰다처럼 건방지고 자기 확신적이지 않고, <에이브 링컨 인 일리노이>(1940)의 레이먼드 메시처럼 연극조로 무게감있게 연기하지 않는다.” 실제의 링컨이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연기하는 링컨이 이제껏 선보였던 어떤 배우의 그것보다 설득력있게 다가왔음은 분명하다. 이유는 명백하다. 에이브러햄 링컨도 한낱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려준 배우는 데이 루이스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에게 링컨 배역을 맡기기 위해 8년간 그에게 구애 작전을 펼친 스필버그나,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나의 왼발> <데어 윌 비 블러드>와 <갱스 오브 뉴욕> 등의 명연기를 통해 데이 루이스란 ‘브랜드’를 믿게 된 평단과 관객은 그의 성공을 확신했지만, 정작 대니얼 데이 루이스에게 <링컨>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도전이었다. 2003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남북전쟁 당시의 링컨을 조명한 시나리오를 들고 그를 찾았을 때만 해도 데이 루이스는 정중하게 스필버그를 돌려보냈다. “어떤 역을 맡고 싶어질 때는 모르는 사람의 인생에 충동적으로 이끌리게 된다. 정확히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씩 첫눈에 이끌리는 캐릭터가 있다. 하지만 링컨 역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5년 뒤, 스필버그가 작가 도리스 컨스 굿윈의 저서 <권력의 조건: 라이벌까지 끌어안은 링컨의 포용 리더십>을 부분 원작으로 한 토니 커시너의 각본을 들고 데이 루이스를 찾았을 때 그의 마음은 움직였다. “스티븐에게 몇번이나 한 말이지만, 도리스의 책을 읽고 나니 더이상 거절할 핑곗거리가 바닥나고 말았다”는 게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변이지만, 짐작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계시처럼 목소리가 찾아오고

돌이켜보건대 데이 루이스의 장기는 한 인물의 악전고투를 구현하는 데 있었다. 짐 셰리던 감독과의 협업을 통한 일련의 작품들이 이를 증명한다. <나의 왼발>의 뇌성마비 화가 크리스티 브라운이나 IRA 폭탄 테러범으로 오인받아 15년간 억울하게 수감 생활을 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의 제리 콘론처럼,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인간의 한계에 직면한 인물들이 어떻게 진흙구덩이 같은 인생에서 다시 삶을 피어내는지를 읽어내는 데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해왔다. 스필버그가 굿윈의 저서를 바탕으로 작업한

<링컨> 시나리오에는 이전 버전에는 없는, 링컨의 고독과 자괴감이 포함되어 있었다. 75만명이 죽어나간 남북전쟁의 말미, 더 많은 죽음을 감수하고서라도 노예제 폐지를 의미하는 수정헌법 제13조 안을 밀어붙여야 했던 링컨은 생애 최고의 위기에 직면했을 것이다. 인간과 배우로서의 한계를 시험하길 즐기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에게 링컨의 말년은 한번쯤 등정해봐야 마땅한 미지의 산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데이 루이스가 링컨을 맡아 처음으로 정복한 봉우리는 그의 ‘목소리’였다. 여느 정치인들과 달리 하이톤에 종종 갈라졌던 링컨의 목소리는 링컨을 링컨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실제로는 영국 악센트에 아일랜드 억양이 섞인 신사적인 목소리를 지녔으면서도, 미국 일리노이, 인디애나, 켄터키 지역의 억양이 뒤섞인 링컨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성대와 후두부에 변압조절장치라도 달려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 목소리는 데이 루이스가 100여권의 링컨 관련 출판물과 저서를 읽고, 일리노이주에 있는 링컨의 집과 변호사 사무실을 돌아보며 링컨의 삶에 몰입해 있던 중 계시처럼 찾아왔다. “그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 목소리를 붙잡아두기 위해 대니얼은 촬영이 끝나기까지 내내 링컨의 목소리를 내며 살아갔다.”(<뉴욕타임스>) 데이 루이스와 같은 영국 출신 배우들이 <링컨> 현장에서 그의 몰입을 위해 영국 악센트로 말하는 걸 금지당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화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내공이 빛을 발하는 또 다른 순간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링컨의 리듬’을 발휘하는 장면들에 있다. 나라의 명운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걸려 있는 상황에서 링컨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전보원들에게 갑자기 실없는 농담을 건네거나, 헌법 13조 수정안의 문제에 대해 성토하는 각료들의 말을 하릴없이 듣고 있다가 갑자기 좌중을 압도하는 날카로운 말들을 쏟아내는 링컨의 모습은 그의 의외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링컨은 뭐든지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 했고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의지하는 논리적 과정에 따라 결론에 도달해야만 했다. 타인에게는 행동하지 않거나 얼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단지 육체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었다. 그는 일단 사물을 분명히 파악한 다음, 머릿속은 한 단계씩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대니얼 데이 루이스) 그런 링컨의 속성을 표현하기 위해 데이 루이스가 선택한 방법은 현장의 완벽한 통제자가 되는 것이었다. 배우, 스탭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스티븐 스필버그조차도 촬영 기간 도중 대니얼 데이 루이스를 “대통령님”이라 불러야 했다. 링컨의 부인 메리를 연기한 배우 샐리 필드는 데이 루이스가 종종 링컨으로서 ‘당신의 A(에이브러햄의 약자)로부터’로 끝나는 문자를 보내왔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이러한 선택을 탓하진 않았다. “나는 많은 것을 희생하지 않고 주인공을 훌륭하게 연기해내는 배우를 보지 못했다. 그들은 희생양이나 마찬가지다.” 각본가 토니 커시너의 말처럼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순간에도 링컨으로 살아가길 고집한 데이 루이스에게 <링컨>의 스탭들은 현장의 모든 통제력을 그에게 양도했다. 그건 자신을 영화의 제단의 희생제물로 몸소 바친 대배우에 대한 존중의 표시였을 것이다.

아주 느리게, 아주 깊게

“만약 내가 1년에 세편씩, 두편씩, 아니 한편씩이라도 영화를 찍는다면, 나는 지금부터 연기를 그만둬야 할 것이다. 나에겐 당신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당신의 상상력은 말라비틀어진 땅처럼 공허해질 것이다”라고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말한 적이 있다. 하긴 <나의 왼발>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다녔으며, <라스트 모히칸>을 위해 수렵생활을 했고 <갱스 오브 뉴욕>을 위해 얼마간 도축자로 살아간 적이 있는 그의 과거를 고려했을 때, 오히려 데이 루이스가 다작의 배우가 아님에 안도하게 된다. 사람인 변(人)에 아닐 비(非). 사람이 아니어야 하는 것이 배우라는 그 유명한 말처럼,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링컨>으로 배우로서 겪어야 할 인간적인 고통과 희열의 역사를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또 한번 아로새겼다. 그가 행할 ‘배우의 증명’을 앞으로 계속 볼 수 있기 위해서라도, 지금으로선 그가 쉬이 지치지 않길 바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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