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배우가 목을 길게 빼고 뚱한 표정으로 나란히 서 있는 <스토커>의 포스터는 상업영화 광고 이미지치고 대담하다. 그랜트 우드의 그림 <아메리칸 고딕>(1930, 위) 속 부녀처럼 그들은 “우리집에 웬만하면 오지 마세요”라는 신호를 쏘아보내 호기심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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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액션영화에 흔히 발급되는 처방으로 “먼저 관객이 연연할 만한 인물을 제시해라. 그래야 관객이 그가 다치거나 죽을까봐 염려하게 되어 스릴이 커진다”라는 항목이 있다. 그러나 인물의 성격을 미처 파악할 겨를 없이 도입부부터 쓰나미가 스크린을 덮치는 <더 임파서블>은 좀 다른 경우였다.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은, 재난에 휩쓸린 사람이 어떤 조건과 성격을 가진 인물이건 막대한 자연재해가 인간이라는 미력한 존재에게 일으키는 보편적인 감정에 관심을 보인다. 주인공 마리아(나오미 왓츠)와 헨리(이완 맥그리거) 부부에 관해 특정한 판단을 내리기 전이었는데도, 나는 가차없이 만물을 쓸어가는 해일 앞에서 울컥했다. 다른 객석에서도 훌쩍임이 들려왔다. 그것은 드라마로부터 도출된 감동이 아니라, 말초적 공포에서 솟은 반사적 눈물이었으나 가짜 눈물도 아니었다. 성난 자연에 압도당해 한없이 작고 연약해진 사람들이 실제로 터뜨리곤 하는 어린아이 같은 눈물. 영화관에서는 별로 흘려본 적 없는 종류의 눈물이었다.
마리아와 헨리, 그리고 부부의 맏아들 루카스의 됨됨이를 관객이 알아가는 건 재앙이 일어난 다음부터다. 하긴, 참사 현장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정확히 말하자면 마리아와 헨리와 루카스, 본인들도 몰랐던 잠재된 면모일 터다. <더 임파서블>이 좋았던 다른 이유는, 보살피는 자와 보살핌을 받는 자를 금 그어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람의 육체는 약하고 의지는 꺾이기 쉬워서, 긴 고난이 닥치면 누구도 내내 강자이고 너그러운 보호자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은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이라도 마찬가지다. 헨리와 마리아는 아이들에게 결코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거나 “걱정 마라. 엄마가 다 지켜줄게”라고 장담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아빠도 무서워”라고 털어놓고 “엄마도 모르겠구나”라고 겁먹은 어린 아들의 물음에 솔직히 대답한다. 그러자, 자그마한 기적이 일어난다. 아이인 줄만 알았던 맏아들이 부상 입은 엄마가 올라타도록 어느새 여문 어깨를 내밀고, 늘 돌봄의 대상이기만 했던 일곱살짜리 둘째가 다섯살 막내의 손을 잡고 보모 노릇을 한다. 몹시 진부하게 들리지만 별수 없다. <더 임파서블>은 가족의 의의를 가르쳐주는 영화다. 구성원 누군가의 일방적 헌신으로 가족의 안녕이 유지되는 가족멜로드라마들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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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헌트>를 가장 무섭게 보는 법. 이 영화의 관객은 루카스(매즈 미켈슨)의 아동성추행 혐의가 누명이라는 사실을 안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영화가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최면으로 추측을 기정사실화하는 마을 주민들의 어리석음을 개탄하고 현대의 마녀사냥에 진저리친다. 하지만 만약 소녀와 루카스 사이의 진실을 보여주는 신들을 가리고 영화를 본다면? 우리는 여전히 주민들보다 우월한 자리에 서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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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트>는 엄연히 현대 미국의 루이지애나를 배경으로 하는 극영화인데도 태평양 어느 외딴섬의 종족에 관한 민족지 다큐멘터리를 보는 감흥을 준다. 수몰 위험 때문에 버려진 낮은 땅 ‘배스텁’(Bathtub)에서 살아가는 극중 인물들이 워낙 특이해서다. 이들은 정부의 상시대피령을 무시하고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치외법권에서 살기를 고집한다. (현대 미술가라면 그들의 주거지를 방문했다가, 초라한 재료와 수법으로 작품을 만드는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의 전시장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배스텁 사람들은 폐품을 가구와 집기로 쓰고 주먹으로 물고기를 때려잡아 먹으면서, 댐 저쪽에서 위생적인 생활을 하는 도시인들을 가엾게 여긴다. 비닐포장된 생선을 먹다니! 1년에 휴가가 한번이라니! 우웩! 가치관이 판이하다보니 희로애락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달라서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일이 금지돼 있다. <비스트>를 보는 동안 나는 어느 영화를 관람할 때보다 극중 인물의 인종을 의식하지 않고 있음을 문득 깨달았다. 흑인, 백인, 히스패닉, 아시아인이 뒤섞여 있는 배스텁 주민들에게는 혈통보다 계급이, 그리고 생활양식이 동족의 조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벤 제틀린 감독은 객관화에 한줌의 미련도 두지 않고 배스텁에 푹 잠겨서 영화를 만들었다. 사건의 인과관계를 가지런히 설명하지 않은 채 정념을 따라 내달리는 <비스트>의 비타협적 형식은 인디영화다운 인디영화라는 호평을 불렀다. 한편 <비스트>는 이야기의 화자인 여섯살 소녀 허쉬파피(쿠벤자네 왈리스)의 클로즈업에 아주 많은 것을 걸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홀몸으로 허쉬파피를 키운 아빠는 딸에게 ‘전설’을 속삭인다. “네 엄마는 너무 아름다워서 부엌을 지나가기만 해도 솥이 끓어올랐단다. 너를 낳고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터질 것만 같았던 엄마는 헤엄쳐서 집을 떠나버렸지.” 신화화된 엄마는 자꾸만 커져서 허쉬파피의 세계를 채운다. 의자에 걸쳐놓은 옷을 엄마삼아 대화하는 이 소녀에게서 한때 모두를 울렸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주인공 제제를 추억하는 사람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다행히 판타지는 소녀를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약골로 만드는 대신, 소녀에게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긍심과 소명의식을 선사한다. <비스트>의 비전 안에서 허쉬파피는 배스텁 주민들을 용감히 이끌고 우주의 무너진 균형을 표상하는 괴물과 맞선다. 여섯살 허쉬파피는 참 빨리도 배워나간다. 나를 존재하게 만든 것들은 나보다 먼저 죽는다는 섭리를. 나는 나보다 작고 다정한 존재들을 돌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당위를. <비스트>는 내게 향수에 젖어 대견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성장영화가 전혀 아니었다. 저 옥수수잎만 한 소녀만큼도 성숙하지 못한 채 여태 나이 먹었다는 사실이 쓰라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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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롱테이크가 아닌 바에야 촬영현장에 간들 영화배우의 라이브 연기를 긴 호흡으로 볼 기회는 없다. 그래서 영화배우들이 연극을 한다는 소식에 솔깃하지만 대개는 놓치고 만다. 어찌어찌 관람을 해도 영화에 비해 현저히 느린 대사와 훨씬 큰 동작에 적응 못하는 일이 많다. 위성 중계방송처럼 액션과 리액션 사이에 한 박자 마가 뜨는 기분이다. 그래도 가가와 데루유키(<도쿄 소나타> <도쿄!>), 히로스에 료코, 차승원, 구사나기 쓰요시가 공연한 연극 <나에게 불의 전차를>은 지나치기 힘든 기회였다. 정의신 각본, 연출의 <나에게…>는 일제강점기 남사당패를 중심으로, 각기 사연을 안고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과 조선 민초들의 우정을 그린다. 구도만 보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한•일판이지만 “미안해서 행복할 수가 없다”는 의식이나 입힌 것과 동일한 피해를 입음으로써 용서를 구한다거나 하는 정서는 일본에 근접해 보였다. 양국 우애를 도모하는 계몽적인 내용인 데다 전통 연희(演戱)를 간간이 선보이느라 드라마는 나이브한 편이었지만 연기를 구경하기엔 어려움이 없었다. 연기의 선이 가늘어서 무대에 어울릴까 궁금했던 히로스에 료코는 감정의 진폭이 큰 역할을 제일 안정적으로 소화했다. 남사당 꼭두쇠로 분한 차승원이 글자 그대로 외줄을 타며 우연에 자기를 내맡기는 클라이맥스에서는 이 배우의 모험적 결의가 전해졌다. 가가와 데루유키는 후반으로 가며 서서히 점화되는 연기를 했고 수차례 커튼콜 중에도 캐릭터의 몸짓을 고집하며 한쪽 다리를 절었다. 역설적으로, 많은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는 이 연극에서 내 주의를 끈 요소는 장면의 주역이 아닐 때 원경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버티는 배우들의 모습이었다. 아마 앵글이 정해져 있는 영화에선 볼 수 없는 광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심 사건에서 한눈을 팔기 일쑤였다. 역으로, 느린 영화건 빠른 영화건 나의 시선은 어느새 영화에 최적화돼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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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트>의 괴물 오록스
모리스 센닥의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생김새의 오록스는 세상의 불행과 두려움을 뭉뚱그린 괴수다. 선사시대 빙하에 갇힌 그들은 우주의 균형이 무너져 극지대의 얼음이 녹으면 풀려난다. 그들의 굶주림은 우리의 공포를 먹고 커진다. <엉클 분미>에 등장한 빨간 눈의 유인원 이래 가장 단순조야하면서도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크리처’ 디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