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과 김지운 감독은 이미 <라스트 스탠드>로 두번 만났다. LA에서 한창 후반작업 중일 때 긴 서면 인터뷰를 보내왔고, 개봉을 기다리던 즈음에는 한국에서 만났다. 뭔가 뜻대로 하지 못한 아쉬움과 넋두리가 가득했다. 하지만 영화가 뚜껑을 연 지금, 오히려 자기 것을 많이 얻어낸 안도의 불평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 할리우드로 우후죽순 진출했던 홍콩 감독들에 비하면, 확실한 장기가 떨어지는 건 분명하다. 어떤 컨셉에서 출발했는지 궁금하다. =오프닝부터 쾅 때리면서 시작하는 느낌은 없다. 마약왕이 탈출하고 FBI를 따돌리고 서머튼의 보안관을 맞닥뜨리면서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그러다보니 오락영화치고는 초반에 인물관계 형성이 중요해서, 마을 정경이나 인물 군상을 20여분 정도 비중있게 다룬다. ‘김지운의 색깔’보다는 ‘<라스트 스탠드>의 색깔’이 먼저였다. 그러려면 관객이 캐릭터의 정서나 감성에 친숙함을 느끼는 게 중요했다. 그런 다음 쭉 밀고나가자는 생각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총알을 남발하기보다 제대로 한방 터트리는 게 전체적인 플랜이었다.
-탈출 신, 협곡 총격 신, 마을 액션 신 등 각기 다른 액션 신들이 저마다의 설계도를 가지고 있다. 특별히 힘든 촬영이 있었나.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이끄는 경찰들과 적들이 맞서는 마을 액션 신은 클라이맥스여서 가장 공들인 만큼 힘들었고, 의외로 협곡에서 야간에 펼쳐지는 총격 신이 골치였다. 이야기 흐름상 탈출하고 도착하고 만나는 그 리듬과 밸런스의 중간 지점이어서 중요한 장면이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돌풍이 와서 제작진이 자연과 싸우느라 힘들었다. (웃음) 한국이라면 한두 회차 다른 날로 미루면 되는데, 할리우드에서는 그럴 경우 다른 회차를 포기하면서 촬영해야 한다. 영화 속 배경은 애리조나주지만 실제 촬영은 뉴멕시코주였는데, 이상하게도 촬영하던 그해에 뉴멕시코 지역이 이상기후였다더라.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포레스트 휘태커 같은 배우를 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잠깐이나마 우유 배달하는 고집불통 할아버지로 나온 해리 딘 스탠튼도 반가웠다. <파리, 텍사스>(1984)부터 <어벤져스>(2012)에 이르기까지 지난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배우다. =나도 그가 캐스팅되어 무척 설렜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그가 장난 아니게 까탈스러운 인간이라며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웃음) 존경심에 더해 그런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그가 처음 현장에 왔을 때 모자를 벗고 마치 ‘깍두기’처럼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미국에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예의 바르게 인사한 일이 처음이었다. 현장에서 늘 감독과 악수하는 정도였을 그분이 내가 그렇게 나오니, 뭔가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타이식으로 손을 모아 합장하더라. (웃음) 그가 보기엔 아시아 국가들은 다 불교를 믿는 줄 알고, 아시아 감독에게 최대한 예의를 차린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딱히 까탈스러운 건 없이 잘 대해줬고 촬영에 임했다. 재밌는 건, 흥이 났다 하면 무슨 아리아 같은 노래를 막 부른다. 그런데 남자 앞에서는 절대 안 부른다. (웃음) 한번은 촬영이 다 끝난 다음 우연히 LA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주변에 젊은 여자들만 있더라. 1926년생이라 나이도 엄청 많은데 엷은 와이셔츠를 입은 그 모습이 참 섹시했다.
‘마을을 지킨다’라는 서부극 서사의 원형
-<라스트 스탠드>는 총기 사용에 대한 명확한 관점이 있고, 그것이 이야기의 흐름이나 스타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총기사건으로 인해 총격 액션영화들이 개봉 일정을 미루거나 하나같이 흥행에 직격탄을 맞았다. =서머튼처럼 미국 남부 끄트머리에 있는 지역은 총기를 쓰는 게 장작 패는 일만큼이나 일상적이다. 집집마다 트럭에 삽이나 곡괭이처럼 총이 실려 있다. 그래서 총기를 유머의 수단으로 중요하게 사용했는데, 할머니가 총을 꺼 내 악당을 쏘는 약간 조롱 섞인 장면은 미국 관객도 정말 재미있게 보더라. 그런데 역시 요즘 총기사건으로 인한 특수한 분위기 때문에 비판적인 시선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한국에서도 당신의 영화는 언제나 무국적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점들이 <라스트 스탠드>를 미국적인 영화로 느껴지게 만든다. 또한 서부극의 무드를 자연스레 풍기게 만든다. =할리우드에서 처음으로 <라스트 스탠드>를 만들고, 또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내 영화 만들기에 어떤 큰 영향을 미친 건 없다. B급 코드의 영화적 재미를 서부극에 버무리는 게 핵심이었다. 늘 서부극을 보면서도 매력적이었던 설정은 ‘마을을 지킨다’는 서사의 원형이었고, 아마추어인 마을 사람들이 구식 총을 총동원해 가공할 전투력을 지닌 집단과 한판 대결을 벌인다는 설정이 매력적이었다.
-좋아했던 서부극은 무엇인가. =가장 좋아한 감독을 꼽으라면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의 세르지오 레오네이고 <리오 브라보>나 <하이 눈>, 그리고 <오케이 목장의 결투>나 <셰인>처럼 유명 정통 서부극들도 좋아했다. 시기적으로 양쪽 영화들을 두루두루 봤던 것 같다. 그럼에도 어딘가 캐릭터의 매력이 더 빛나고 기존의 얼개를 완전히 비틀어버린 레오네쪽이 좀더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존 포드의 <수색자>는 감독이 되고 나서 뒤늦게 봤는데 ‘웨스턴의 세계가 정말 광활하구나’ 하면서 엄청난 매력을 느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왕년의 액션 히어로로부터 멀어져 여느 할리우드영화에서 보아온 초라한 가장의 모습 그대로다. 더 불쌍하게 만들 수도 있었는데 좀 자제한 듯한 인상도 받았다. =사실 더 불쌍하게 보이는 장면들은 좀 덜어냈다. 인상 쓰면서 집에서 혼자 파스 바르는 장면도 있었다. 그 장면의 경우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어색하다는 의견이 많아서 뺐다. 아놀드 본인이나 제작자 로렌조 디 보나벤추라 역시 지금 정도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런 불쌍한 모습 때문에 신선하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아직 그런 장면을 원하지 않는 팬들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 가령 후배 경찰인 제리가 죽었을 때 아놀드가 흐느끼는 장면은 그로서도 생전 처음 해보는 촬영이었다. 그 장면을 두고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논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라스트 스탠드>는 주지사였다가 배우로 복귀한 아놀드의 개인적인 모습이 보안관 레이의 고독하고 쇠락한 느낌과 맞물리길 원했다. 사연 많아 보이는 주름의 음영이 매력적이어서 클로즈업도 빈번히 사용했다. 장르적으로는 B급 서부극이면서 캐릭터적으로는 현실이 투영된 그의 정서가 영화에 중요하게 작용하리라고 봤다.
-김지운식 소소한 유머들이 눈에 띈다. 리암 니슨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로 주인공이 바뀌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상영시간 내내 본격적으로 작정하고 터트리지 못하는 아쉬움도 동시에 느꼈다. =철창에서 인사를 나누는 친구들의 모습이나 적을 총으로 한방에 해결하는 할머니 같은 장면은, 시나리오에 있지만 내가 낸 아이디어들이었다. 조니 녹스빌이 업힌 채 실려나가며 투구가 소란스럽게 질질 끌리는 장면도 즉석에서 낸 아이디어였다. 그 장면을 자세히 보면 여주인공인 제이미 알렉산더가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막 웃고 있다. 사실상 NG인데 그대로 쓴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처럼 주인공이 교체되면서 분위기상 변화의 폭이 커야 했는데, 빡빡한 프리 프로덕션상 살려내지 못한 아이디어들을 현장에서 많이 냈다.
할리우드 시스템은 ‘기브 앤드 테이크’
-완성된 영화를 보면 처음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감독으로서, 이래저래 끌려다녔다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의견을 상당 부분 개진한 것으로 느껴진다. =아놀드가 스쿨버스 아래에 매달려 총을 쏴 운전석에 앉은 버렐(피터 스토메어)의 귀를 날려버리는 장면도 시나리오에 없었는데 즉석에서 떠올린 장면이었다. 폭발해 터져서 날아간 살점이 쓰러진 사람의 등에 툭 떨어지는, 어딘가 하드코어적인 그런 장면을 넣는 것도 상당한 의견 조율이 필요했다. 옥수수밭 체이스 신도 내가 촬영 전부터 고집해서 넣은 장면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연스레 흘러가는 여러 장면들도 사실상 엄청난 물밑작업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크랭크인 전에 냈던 아이디어와 촬영 도중 냈던 아이디어들이 뒤섞여 있는데, 내가 원하는 걸 얻으면서 또 어떤 건 포기해야 하는 반복적인 ‘기브 앤드 테이크’의 과정이었다. 어쨌건 내가 현장에서 내는 아이디어들도 많다보니 스탭들이 정말 괴로워했다.
-할리우드에서는 그런 갑작스런 현장의 셋업 변화가 거의 힘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했나. =내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꺼내기만 하면 거의 패닉 상태가 되긴 했다. (웃음) 그러면서 ‘조금만 더 빨리 얘기해줄 수 없었냐’고 초조해한다. 현장에서 그렇게 바꾸는 게 힘들긴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할 때 제작자가 허락해주면 된다. 그런데 그로 인해 회차 조정이나 비용 추가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빨리 승인받는 게 중요하다. 다행히 로렌조가 현장에 머무는 날들이 많았기에 그런 아이디어가 신속하게 반영됐다. 그는 정말 일중독의 현장형 프로듀서여서, 그런 과정에서 자기가 솔루션을 가지고서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조절하고 대응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런 마인드가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됐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언제쯤 완벽한 적응을 했다고 생각하나. 배우들의 표정에서 영화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촬영 중후반부터는 스스로도 시스템에 적응하고 나를 컨트롤할 수 있었다. 특별한 간섭도 없었다. 한번은 로렌조가 “아놀드가 지운 얘기는 들으니까, 이것 좀 얘기해줘”라며 나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웃음) 그러면서 내가 이 영화의 감독이 맞구나, 현장의 중심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마을 액션 신에서 옥상으로 이어지는 집에 들어가 계단과 복도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는데, 원래 없던 장면이지만 뭔가 느슨한 액션 신의 한가운데에 다시 꽉 조여 주는 ‘새끈한’ 총격 신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꼭 넣고 싶었다. 다행히 해가 떨어져도 실내에서 촬영해도 되는 장면이라 추가 수당을 지불하고 촬영 한 장면이다. 그런 식으로 어지간한 내 아이디어를 다 들어주려고 했다. 몇몇 장면들에 대해서는 촬영이 끝난 다음 “지운, 네가 고집 피워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반대할 때 포기했으면 너를 원망했을지도 몰라”라고 웃으며 얘기하기도 했다. 아놀드 역시 나에게 지속적인 신뢰를 보내줘서 든든했고, 그게 다른 부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현장에서 배우들의 신뢰를 얻는 일이 무척 중요했다.
-북미 개봉을 지나 한국 개봉을 기다리는 소감이 어떤가. =‘<라스트 스탠드>를 보고 누가 한국 감독이 만든 영화라고 생각할까’라는 평가는 은근히 좋다. 큰 욕심 안 부리고 북미 관객을 대상으로 즐거운 오락영화를 만들자는 생각에 충실하고자 했다. 내가 의도적으로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는 부분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실시간의 과정을 한데 녹이고 싶었다. 라스트 신의 클리셰 같은 경우는 이미 영화가 끝난 다음에 찾아오는 평화로운 순간이라, 전체적인 영화의 결을 해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마저 어떻게 바꾸는 건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과정이 아까 얘기한 기브 앤드 테이크의 과정이다. 한국에서 영화 만들 때는 ‘왜 영화를 속시원히 해결하지 않고 끝내냐’는 질타를 받기도 했으니 기분이 묘하긴 하다. (웃음)
-이후 계획은 어떻게 되나, 혹시 할리우드에서 다시 작업할 계획은. =오시이 마모루가 각본을 썼고, 사실상 그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인랑>의 실사화를 검토 중이다. 국내에서 제작하며 SF적인 느낌으로 해석할 계획이다. 예정대로 여름에 촬영들어가면 연말에 끝내고, 다시 미국에서 영화를 할 것 같다. 현재 세 작품 정도 얘기가 오가고 있는데 각각 SF스릴러, 심리적 밀도가 높은 액션스릴러, 그리고 한 보디가드의 미스터리를 다루는 작품이다. 3월경 미국에 가서 얘기를 나누면 보다 구체화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