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싸운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그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까까머리 시절 300원짜리 삼중당문고로 읽었던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이다. 35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아브락사스’라는 말이 꽤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내 머릿속에서 ‘아브락사스’라는 말은 아직도 알이라는 세계를 깨고 나오려는 새의 영웅적 고투와 결합되어 있다.
며칠 전 바타유의 <기저유물론과 영지주의>를 읽다가 다시 이 낱말과 마주쳤다. 그 에세이에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진 돌의 모습을 담은 네장의 사진이 함께 실려 있는데, 글의 말미에 그는 도판들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덧붙인다. “이 글에 수록된 돌들은 영지주의의 돌(gnostic stone), 바실리데스의 돌, 혹은 아브락사스라는 전통적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들의 정체와 명칭은 영지주의 철학자 바실리데스의 전설 및 철학에 기원을 둔다.”
아브락사스 스톤에 새겨진 것은 영지주의의 다양한 영적 실체들이다. 가령 사람의 몸에 오리 머리를 가진 세 형상은 ‘아르콘테스’(archontes), 일곱개의 천체에 둘러싸인 환상적 동물들은 창세의 신, 저주받은 신인 ‘야오’(Iao), 두개의 동물 머리 아래 염소의 다리를 가진 머리 없는 신은 이집트의 신 ‘베스’(Bes)라고 한다. 마지막 사진은 닭의 머리, 뱀의 몸, 사람의 다리를 가진 신을 보여준다. 이 형상의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어서 바타유는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그 공통적 특징들로 인해 영지주의라는 이름 아래 함께 묶일 수 있는 이 돌들이 반드시 영지주의 종파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그것들의 기원은 그리스나 이집트의 마술에서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아무튼 한편으로는 종교적 표상들의 혼합주의(syncretism)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관련된 전설들의 빈번히 불가해한 성격 때문에, 그것들은 해석에 극도의 어려움을 제공한다.”
영지주의의 세계
영지주의의 역사는 기독교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설도 있지만, 그것의 윤곽은 기원후 2세기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바실리데스의 가르침을 통해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안에 워낙 다양한 종파들이 존재하고, 그 자체가 헬레니즘 철학, 이집트의 종교, 유대의 신앙,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등 다양한 원천에서 유래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혼합종교이기 때문에, 영지주의에 대해 하나의 통일된 상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영지주의 종파들이 공유하는 특징이 있다면, ‘물질의 세계는 악(惡)이며 오직 신령한 지식(gnosis)을 통해서만 거기서 해방될 수 있다’는 믿음일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교회가 가르치는 ‘신앙’이 아니라, 개인의 명상으로 얻은 신비한 ‘지식’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구원이라는 결정적 문제에서 제도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에, 영지주의는 초기부터 유대교와 기독교에 의해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에 못지않게 위험한 것은 ‘악마로서 신’이라는 영지주의의 관념이리라. 영지주의는 인식할 수 없는 초월적 신과 물질세계의 창조자인 데미우르고스를 구별한다. 하지만 물질세계 자체를 악으로 보는 한, 그 세계의 창조주 역시 악마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신을 세계의 창조주로 간주하는 유대교나 기독교에는 이것이 매우 불편하게 들렸을 거다. 데미우르고스는 종파에 따라 ‘아담 카드몬’, ‘아흐리만’, ‘사탄’. ‘야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다시 바타유가 제시한 아브락사스의 돌로 돌아가자. 사실 ‘아브락사스’의 의미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그중의 한 견해에 따르면, 아브락사스는 창조주 데미우르고스가 거느린 ‘아르콘’(archon)이라고 한다. 아르콘, 혹은 아르콘타는 행정을 맡은 집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타유가 제시한 도판 중에서 오리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세 형상은 데미우르고스를 도와 그의 창조를 거드는 그의 시종들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일곱개의 천체로 둘러싸인 창조의 신 ‘야오’(ΙΑΩ)는 아브락사스의 히브리식 명칭이다. 그를 둘러싼 일곱 천체는 아마도 그가 창조했다는 우주의 상징일 것이다. 그 이름 속의 일곱 철자(ΑΒΡΑΣΑΞ)는 일곱개의 고전적 천체(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를 가리킨다. 한편, 아브락사스는 365개 하늘의 창조를 맡은 집사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의 이름을 구성하는 철자들의 숫자 값을 더하면 365가 된다(Α=1, Β=2, Ρ=100, Α=1, Σ=200, Α=1, Ξ=60).
이렇게 아브락사스는 때로는 창조주의 집사로, 때로는 창조주의 집사장으로, 때로는 창조주 자신으로 여겨진다. 아브락사스의 형상은 여러 동물을 하나로 합친 키메라로 묘사되곤 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도상은 닭의 머리(혹은 사자의 머리), 사람의 몸, 뱀의 다리를 한 ‘앙구이페데’(anguipede)다. 바타유가 제시한 사진 속의 아브락사스는 닭의 머리에 뱀의 몸, 사람의 다리를 하고 있다. 몸과 다리가 뒤바뀌어 있지만, 그 일반적 도상에 가장 근접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악마로서 신
교부들이 영지주의에서 위험하게 본 요소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유래한다. 구약성서의 야훼는 처음에는 그 안에 빛과 어둠을 모두 포괄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인간에게 벌을 주어야 할 때에는 그 악역을 사탄에게 맡기기 시작한다. 이는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유대교 신앙에 침투한 결과라고 한다. 페르시아의 신앙에 따르면, 세상은 처음부터 선과 악, 빛과 어둠, 정신과 물질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
유대교와 기독교에 따르면, 물질도 결국은 신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세계관은 철저히 관념론적이다. 하지만 물질이 처음부터 신과 공존한다고 보는 페르시아의 세계관은 아무래도 유물론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다. 거기서 물질은 그저 신이 만들어 조물딱거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헤세가 말한 알 속의 새처럼 그 자체가 살아서 꿈틀거리며 스스로 형태를 취하여 탄생하려 한다. 아브락사스는 스스로 창조하는 그 물질의 상징이리라.
영지주의에 따르면, 세계는 바로 그 악마의 억제할 수 없는 창조적 본능의 산물이다. 구약성서에서 사탄은 아직 신에게 종속된 존재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사탄은 더이상 신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다. 아브락사스는 신에게서 독립한, 아니 애초에 그에게 속하지 않은, 그리하여 처음부터 그와 대등한 존재가 될 것이다. 바타유는 여기서 일체의 신학을 무너뜨릴 새로운 유물론, 즉 ‘기저유물론’(base materialism)의 가능성을 본다.
아니, 신과 악마는 애초에 하나의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정신분석학은 우리 모두가 자신 안에 두개의 인격을 통합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브락사스는 신에 거역하여 우리가 들어 사는 물질적 세계를 창조했다. 신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나, 왜 그것을 끝까지 막지 않고 끝내 허용해야 했을까? 아브락사스는 어쩌면 초월적 신의 무의식, 초월의 필요에 억눌린 물질적 창조의 본능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