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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영 감독, 요리사 허인을 만나다
주성철 사진 오계옥 2013-02-19

‘영화인들의 사랑방’이자 ‘서촌의 랜드마크’라고 아는 사람들끼리 은밀한 패스워드처럼 공유하는 공간이 있다. 이탈리아 가정식 요리를 중심으로 허인 셰프가 운영하는 효자동의 레스토랑 ‘두오모’가 그곳으로, 궁중음식연구가인 한복려 선생이 아끼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에는 잠시 서촌 가게의 문을 닫고 ‘영화의 전당’에 자리를 마련해 많은 관람객과 영화제 스탭들이 부산에서 두오모의 파스타를 즐겼다. 서촌의 ‘동네 주민’ 이해영 감독이 허인 셰프를 만나 말 그대로 편안한 ‘가정식’ 대화를 나눴다. 오히려 ‘영화’를 지우고서 요리와 서촌,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끼어드는 편안함이 좋았다. 마침 우연히 가게에 들른 또 다른 동네 주민 김종관 감독도 멀찌감치 그들의 대화를 ‘감상’했다. 서촌에서 즐길 수 있는 여유랄까.

허인_영화 하는 사람도 아닌데, 왜 나를 만나자고 한 건지? (웃음)

이해영_늘 궁금했다. 서촌에서 5년째 레스토랑을 꾸리는 것도, 부산영화제 때 일종의 부산출장소를 운영한 것도, 그리고 부지영 감독이나 이모개 촬영감독하고도 절친한 동창으로 알고 있으니 아예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고. (웃음) 먼저 부산출장소는 어떻게 계획한 건가?

허인_부산국제영화제 서울사무소가 이 동네에 있을 때 홍효숙 프로그래머가 두오모를 자주 찾았다. 한번은 부산에서도 두오모 밥이 먹고 싶은데 그런 걸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동안 ‘영화의 전당’에 임시로 문을 연 두오모

‘동네’라는 말이 정말 어울리는 곳, 서촌의 한 골목에 자리한 두오모

부산영화제 때 일종의 ‘밥차’ 역할을 했다

이해영_여관에서 밥해주는 아줌마 혹은 영화현장의 ‘밥차’ 느낌이다. (웃음)

허인_기본적으로 영화하는 사람들의 열정을 좋아한다. 힘들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 말고도 그들에게 직접 봉사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영화도 그런 봉사하는 사람들 아닌가. 가끔 부지영, 이모개 감독 만나면 영화하는 친구들의 열정이 부러웠다. 영화에 대해 잘 모르는 입장에서는 남자들이 군대 얘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도(웃음) 정말 열정적으로 얘기한다. 그런 단순한 열정 같은 게 빛나 보였다. 내가 만든 음식으로 도와주고 싶다, 뭐 그런 거?

이해영_부산 음식도 2, 3일 지나면 질린다. 특히 변영주 감독 같은 분은 회도 싫어해서. (웃음) 그래서 그런 기획이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제가 영화뿐만 아니라 관련된 그 모든 것들을 마켓화할 수 있다면, 지난해에는 두오모밖에 없어 아쉬웠지만 앞으로는 좀더 규모있게 해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허인_같은 생각이다. ‘영화의 전당’에서 컵라면이나 패스트푸드로만 식사를 해결한다고 생각하니 좀 안타까웠다. 사실 부산영화제 기간 내내 서울 가게 문을 닫는다는 게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스탭들도 다들 찬성해서 용기를 냈다. 메뉴는 단순화하고 가격도 낮추고.

이해영_막상 영화인들이 득시글대는 영화제에 참여한 소감은 어땠나? 그것과 별개로 영화제가 사람들을 약간 ‘업’시키는 느낌도 있었을 테고.

허인_일단 첫날 정우성씨가 식사를 하러 와서 스 탭들도 그렇고 바로 ‘업’됐다. (웃음) 서울 가게에도 정우성, 이정재 두 사람이 창가에 앉아 식사를 한 적 있는데 그림 그 자체였다. 그 다음날은 <위험한 관계>로 부산을 찾은 장동건씨가 와서 사인도 받고. 영화의 전당 내 더블콘 4층에 있었는데 두오모라는 이름을 빼고 일했다. 드러낼 만한 자리가 아닌 것 같아 그렇게 했다. 하루 300인분 정도 준비했는데 힘들었지만 재밌었다. 막판에는 식중독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갔지만. (웃음)

이해영_영화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고생한 것 같다. 올해도 갈 생각인가?

허인_두오모 같은 업체들이 10개 정도는 가야 보기 좋게 꾸며지지 않을까. 해외영화제에서 보는 것처럼 되게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그림이면 좋을 것 같다. 그 안에서 두오모가 한 조각으로 자리하면 된다.

이해영_좋은 생각이다. 영화제는 부산에서 열리지만 세계 각국의 영화인들이 몰려오니 그 안에서 전국의 지역별 맛집들이 다 모여 음식을 선보이는 거다. (웃음) 부지영, 이모개 촬영감독과는 어떻게 동창인가? 두 사람의 출신학교가 다르다.

허인_부지영 감독과는 이화여대 동기고, 나중에 중앙대 사진학과로 편입해서 이모개 감독을 알게 됐다. 이모개의 사진을 좋아했는데 감각이 굉장히 좋았다. 모개는 나중에 촬영 전공으로 영상원에 갔는데 그를 통해 김병서를 알게 됐고, 그러다보니 두루두루 친해지게 됐다.

이해영_영화일을 꿈꿔보지는 않았나?

허인_영화 편집에 관심이 많았다. 인정옥 언니가 스크립터를 하던 시절 막 따라다녔다. 하고 싶어서 쫓아다니던 시절이라 좀더 용기를 냈으면 시작할 수도 있었겠지만….

요리사 허인 이탈리아 레스토랑 ‘두오모’ 셰프

철학, 사진, 디자인, 출판 그리고 요리

이해영_철학을 하다가 사진으로 전공을 바꾼 셈인데, 사진은 재밌었나? 최근 셰프님과 친해지게 된 계기가 인스타그램을 하면서부터인데 스마트폰 퀄리티라고는 믿기지 않게 잘 찍더라. (웃음)

허인_원래 이미지를 다루는 일을 하고 싶었다. 당시만 해도 영화는 힘들 때였고 스스로 능력이 없다고도 생각해서…. 그러다 결국 한달 일할 아르바이트를 구한다고 해서 들어갔던 디자인 회사에서 기획편집으로 8년이나 일했다. 철학, 사진 전공한 경험이 꽤 큰 도움이 됐다. 그런데 드라큘라처럼 사람을 쪽쪽 뽑아먹는 회사여서 나오게 됐고(웃음) 다시 출판사로 갔는데 거긴 그 고요함이 너무 힘들었다.

이해영_그러다 어떻게 요리로 전향하게 됐나?

허인_누구나 막연히 마흔살에 뭐할까, 그런 꿈을 꿀 텐데 나에게는 그게 요리사였다. 하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도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다. 그런데 마흔도 되기 전에 이하선암에 걸렸다. 그래서 지금 침샘이 하나 없어서 양쪽 얼굴선이 좀 다르다. 우리 가계가 ‘암 패밀리’라고 해도 될 만큼 안 좋았던 분들이 많아서 딱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다행히 아직 젊은 나이라 수술경과가 좋았고 생각지도 않았던 암 보험금을 타게 됐다.

이해영_요리 유학의 결정적인 계기는 결국 암이었던 셈이다.

허인_맞다. 나로서는 36살이 돼서야 졸지에 인생의 경로를 바꿀 기회가 생긴 거다. 식구들끼리 농담으로 ‘아빠 배 째고 엄마가 돈방석에 앉았다’는 말을 할 정도로(웃음) 암수술을 2번이나 했던 아버지로 인해 좀 ‘쿨’한 분위기다. 그래서 나도 하고 싶은 걸 빨리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장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해영_왜 프랑스가 아닌 이탈리아였나?

허인_이탈리아는 메뉴 자체가 그 요리의 이름이다. 가령 ‘안초비와 레몬을 믹스한 드레싱에 으깬 계란, 그라나 파다노 치즈와 프로슈토칩을 얹은 로메인 샐러드’라는 식으로 얘기한다. 반면 프랑스 요리는 무슨 소스로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다. 이탈리아 요리도 물론 그 안에 다른 비법이 있겠지만 난해하지 않다. 심플한 것과는 좀 다른 솔직함이라고 해야 하나. ‘어, 이거 내가 시킨 것과 다르네?’ 하는 격차가 거의 없다. ‘아무개 소스로 어떻게 조리한 무슨 요리’ 그렇게 딱 나온다. 멋지지 않나? (웃음)

이해영_사실 난 전혀 요리를 할 줄 모른다.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유학 생활은 어땠나?

허인_열심히 배웠다. 한 10kg 정도 빠져서 거의 뼈만 앙상할 정도였다. 1년 정도 공부하고 몽블랑이 보이는 이탈리아 북부의 한 조그만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영화학교를 졸업했다고 다 영화일을 하는 게 아니듯 요리학교도 마찬가지다. 거기서 취미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한국으로 오기 한달 전 올리브 농장에서 일을 했는데, 거기서 사람들 밥을 해준 적이 있다.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더라. 식당에 찾아온 손님들이 아닌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 맛있다고 해주니 무척 신이 나더라. 그때 요리사가 돼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 같다. 맨 처음 잡은 두오모의 컨셉은 ‘이탈리아 가정식’이었다. 동네 슈퍼 할아버지나 가게 할머니들에게 얻어낸 레시피가 중심이 됐다.

이해영_쉽게 말해 ‘이탈리아 함바집’이로구나. 그래서 두오모가 마음에 든다. (웃음)

영화감독 이해영 <천하장사 마돈나> <페스티발>

‘효자동 요리사’다, 서촌의 매력은 뭘까

이해영_왜 효자동에서 레스토랑을 열 생각을 했나? 2000년대 중후반이면 자연스레 북촌이나 신사동 가로수길이나 홍대, 혹은 대학로를 떠올렸을 텐데.

허인_원래 이 동네에 있던 ‘레써피’를 좋아했다. 두오모보다 4년 더 된 레스토랑이다. 여기 서촌에 와서는 서울 하늘 아래 이런 동네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 그리고 영화하는 사람이건 누구건 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북촌 삼청동만 해도 이미 2008년에는 포화 상태였다. ‘하루에’를 폄하하는 얘기가 아니라 하루에가 북촌에 입점하는 걸 보면서 거기도 돈으로 경쟁하는 지역이 됐구나, 하면서 변해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마침 서촌에 좋은 자리가 났기에 망설이지 않고 계약했다.

이해영_사실 서촌은 북촌에 비해 홍보하기도 애매하고 주차시설도 딱히 없고 여전히 청와대 옆 낡은 동네라는 인상이 강하다. 길을 설명할 랜드마크라는 게 없다. (웃음) 그렇게 문화적 인프라가 없던 시절 뭔가 선구적 안목 혹은 이상한 모험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허인_내 막연한 느낌이나 취향과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있구나, 생각했다. 내가 영화했던 사람도 아니면서 점차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아가게 된 것처럼 두오모가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다. ‘레써피’ 언니도 ‘고희’ 사장님도 ‘MK2’도, 맞은편 ‘퍼블릭’의 구정아 PD도 다 가족 같은 동네 친구들이다. 조그만 밥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언젠가 더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고.

이해영_뭔가 저예산으로 시작한 영화가 어느 순간 막강한 상업영화가 된 듯한 동화 같은 얘기다. 힘든 점은 없었나?

허인_지하철 경복궁역에서 한참 와야 하니까 다들 교통이 불편하다고 난리였다. 셔틀버스 운행하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웃음) 무엇보다 가게 오픈하고 얼마 안돼 촛불시위가 거세게 열릴 때라 그 기분이 참 묘했다. 전경들이 가게 앞에 시커멓게 깔려 있는데 그 창 안에서는 파스타를 먹는 풍경. 게다가 그때는 경복궁역에 지하철이 아예 서지 않아서 집에 가는 일도 고역이었다. 고희 사장님하고 도시락 폭탄 만들까, 하는 농담도 했다. (웃음)

이해영_나는 지금껏 쭉 홍대 앞을 터전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데 지난해에 서촌을 발견하면서 ‘유레카!’를 외쳤다. 물론 홍대쪽에 살면서 얻은 긍정적인 에너지도 있지만 어느 순간 온몸이 제이슨 므라즈로 샤워를 한 듯한 느낌이 들고, 뻔하고 과시적인 인테리어가 거슬리기 시작하고, 어딘가 시각이 하향평준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피곤해졌었다. 홍대가 그런지 록 같다면 서촌은 여전히 문학적인 향기가 많이 나서 좋다. 나의 40대를 이 동네에서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인_서촌은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 동네다. ‘동네’라는 말이 정말 어울리는 곳이다. 간혹 이상한 꿈을 가지고 서촌에 가게를 열었다가 3개월여 만에 문 닫고 다시 돌아가는 분들도 꽤 많이 봤다. 헛된 꿈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곳이 아닌 것 같다. 골목 골목 다 정을 붙여야 살 수 있는 곳이다.

이해영_행정구역상으로 필운동인데, 이사할 때 가장 낯설었던 경험이 ‘왜 이 동네 오게 됐어요?’라는 질문이다. 부동산 아저씨도 집주인 할머니도 다 그렇게 물어봤다. 또 신기한 게 전입자 대상으로 ‘동네 골목길 투어’를 한다고 연락이 왔더라. (웃음) 그래서 어머니가 옛날 생각 좀 하시게 대림미술관에서 출발하여 배화여대 등을 거치는 그 투어를 함께했다. 정말 신선했다.

허인_나에게도 이곳은 집이자 가게다. 모두가 편안하게 찾아오고 쉬다 가는 곳이었으면 한다. 그래서 나름 ‘Books & Cooks’라는 컨셉으로.

이해영_그러기에는 책을 좀더 갖다놔야. (웃음) 이제 서촌의 동네 주민으로서 좋은 사랑방이 생긴 것 같아 만족스럽다. 허진호, 김종관 감독 외에 더 많은 이웃들이 생겼으면 좋겠다. 다들 여기 이탈리아 함바집에서 만났으면 좋겠다.

허인_이렇게 5년이 지나갈지 몰랐다. 학창 시절 우상이었던 신경숙 선생님이 찾아주셨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내 20대의 전부나 다름없던 소설들의 작가님이 내 밥을 먹는 기분이란. 언제든 오시라. 그전에 여기 <천하장사 마돈나> DVD에 사인부터.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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