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우정이나 의리를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나이가 들고 결혼하고 돈에 찌들어도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자신의 낭만적인 성향은 의리에 가치를 둔다고 착각한다. 이런 경향은 영화를 통해 더욱 공고해진다. 의리에 살고 죽는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어린 시절의 낭만은 머리가 굳은 뒤에도 크게 바뀌지 않는다. 의리와 우정을 시험당하는 순간이 오면 영화 속 영웅의 행동과 비슷하게 대응할 거라고 다짐한다. 쉰 가까이 살면서 수많은 친구들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서 엄청나게 충직한 친구를 본 기억은 없다. 나와 내 친구에게 특별히 문제가 있다고 보진 않는다. 의리로 똘똘 뭉친 인물은 영화에나 존재한다. 현실에선 꿈꾸면 안될 일이다.
1970년대 미국의 일부 작가들은 프렌치 누아르의 피를 물려받았으면서도 일말의 낭만성조차 부정하며 건조한 삶으로 뛰어들었다. 보스턴 지하세계의 지옥도를 그린 <에디 코일의 친구들>은 현실을 두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세 아이와 부인을 둔 코일은 쉰을 갓 넘긴 중년 남자다. 그는 총 밀반입자와 은행 강도단 사이에 위치한다. 애송이 밀반입자는 돈을 위해 얼치기 은행털이들과 따로 거래하고, 범죄 기록에서 풀려나려는 코일은 경찰과 거래하는 과정에서 총 밀반입자를 넘긴다. 코일이 들르는 술집의 딜런은 친구처럼 굴지만 경찰의 끄나풀이자 킬러다. 코일이 조직의 윗선까지 건드리려 하자, 조직은 딜런과 접촉해 처리를 요청한다. 은행 강도로 인해 긴장감으로 시작하나 총격장면은 한번밖에 안 나오는 영화다. 제목에는 친구라는 단어가 붙어 있으나 기실 친구는 눈을 씻고 봐도 찾지 못할 영화다. 경찰은 딜런에게 “우리는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나는 친구에게 그가 할 수 없는 것을 부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가 하지 못하리란 걸 알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에디 주변의 모든 남자들이 그렇듯, 그들 또한 친구가 아니었던 거다. 역설적인 제목인 거다. 조직은 의리의 서클이 아닌, 돈을 주고받는 직업적 동료의 집합에 불과한 거다. 70년대 미국영화는 동부의 도시를 사랑했다. 도시와 서부는 공히 황량하지만, 따뜻하고 정의로운 서부의 세계는 싸늘하고 추악한 동부 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배신에 익숙하고 인생에 지친 남자의 역할에 로버트 미첨만 한 배우는 없다(<사냥꾼의 밤>은 얼마나 부당한 배역인가). <과거로부터>에서 <러스티 맨>에 이르는 수많은 영화에서 그가 슬픈 표정을 짓는 이유를 깨달았을 때, 나는 존 웨인보다 미첨을 더 사랑하게 됐다.
글을 쓰다보면 간혹 그런 일이 생긴다. 지인들이 특정 문구를 지적하며 “좀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고 물어본다. 어쩔 수 없다. ‘I am’ 대신 ‘Wanna be’를 글에 드러내는 걸 굳이 숨길 마음은 없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다. 얼마 전, 자신이 권력에서 자유로운 의로운 인물이라도 되는 양 뻔뻔하게 구는 모씨의 글을 읽었다. 역겨웠다. 이제 좀 솔직해지자. 남자의 의리가 어쩌면 과장된 신기루라는 걸, 지친 나이와 함께 받아들이자. 살려고 몸부림쳐도 돌아오는 건 별로 없는 세상이다. 모씨처럼 살아도 마찬가지다. 허상을 하나씩 덜어내며 사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