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세미나 11번째 책 <자크 라캉 세미나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을 읽다가 다시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1533)과 맞닥뜨렸다. 이 작품은 영국 헨리 8세의 궁정에 프랑스 대사로 와 있던 장 드 댕트빌과 라보르의 주교였던 조르주 드 셀브의 더블 초상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종류의 더블 초상을 미술사에서는 ‘우정의 그림’(Freundschaftsbild)이라 부른다. 두 친구의 우정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함께 사진을 찍어두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당시에는 꽤 일반화한 관습이었다고 한다.
이 그림이 유명해진 것은 물론 그 안에 왜상(anamorphosis)으로 그려진 두개골 때문일 것이다. ‘왜상’은 투시법의 일종으로,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달리 사물을 평면이 아니라 사면 혹은 원뿔이나 원통 혹은 피라미드나 다면의 결정체에 투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투사된 그림은 정상적인 지각의 조건에서는 모습을 감추어버리고, 특정한 각도에서 비스듬히 보거나, 혹은 원뿔, 원통, 피라미드 모양의 거울이나 결정체 모양의 렌즈를 통해서 봐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것이 아예 삶의 모토였으나, 중세에는 사체의 묘사가 금기시되지 않았다. 가령 교회나 수도원의 벽에는 <죽음의 무도>가 그려져 있어, 사람들은 무덤에서 걸어나온 시체들이 산 사람들을 공동묘지로 이끄는 으스스한 장면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오면서 너무 혐오스럽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는지, 마카브르 묘사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바로크 시대에 이르면 사람들은 달랑 두개골 하나로 죽음을 표상하게 된다.
<대사들>의 두개골은 바로크의 죽음의 관념을 미리 보여준다. 거기서 죽음은 삶의 한가운데에 슬쩍 감추어져 있다. 중세인들은 삶에 들러붙은 죽음이라는 이물질을 신앙의 힘으로 떼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근대인들은 더이상 그런 신학적 해법을 믿지 않는다. 죽음은 삶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중세의 메멘토 모리는 인생의 무상함을 바라보는 우울함, 즉 ‘바니타스’(vanitas)의 감정으로 변한다. <대사들>의 두개골은 이 바니타스 심벌이다.
응시와 예술
라캉이 이 그림을 정신분석에 끌어들이는 방식이 흥미롭다. 먼저 그는 사물의 ‘응시’(regard)에 대해 얘기한다. 사실 인간은 시각의 주체이기 이전에 대상이었다. 선사시대의 인류는 아마도 늘 어디선가 맹수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갔을 것이다. 동물들이 자신을 감추기 위해 자연물로 위장하거나, 맞닥뜨린 적 앞에서 죽은 척하는 것은, 그들이 표상의 주체이기 이전에 먼저 응시의 대상으로 살아야 했음을 의미한다. 응시는 위협적인 것이다.
이 맥락에서 라캉은 모든 응시는 사악하다고 말한다. “사악한 눈은 마력(fascinum)이다. 그것은 움직임을 구속하고 문자 그대로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갖는 힘이다.” 이 사악한 응시를 진정시키는 방법이 있다. 동물이 응시의 힘에 의태로 대응한다면, 인간은 그림이나 회화로 거기에 대응한다. 라캉은 “동물 수준에서 관찰되는 의태 현상들이 인간의 예술이나 회화라고 하는 것과 유사함”을 확신한다. 한마디로 상상계와 상징계의 연합으로 응시를 진정시키는 것이 회화라는 것이다.
원근법에서는 내 눈이 꼭짓점이 되고, 내가 보는 장면은 평면이 된다. 꼭지점과 평면을 이으면 삼각형의 시각장이 형성된다. 이것이 원근법적 ‘표상’의 공간이다. 반면 ‘응시’에서는 이 관계가 뒤집힌다. 여기서는 사물의 눈이 꼭짓점이 되고, 그것이 보는 장면이 평면이 된다. 나는 평면에서 하나의 얼룩일 뿐이다. 여기서도 꼭짓점과 평면을 이으면 뒤집힌 방향의 삼각형이 만들어질 것이다. 방향이 뒤집힌 이 두개의 쐐기가 맞물리는 중간 지점에 선을 긋자. 그것이 ‘이미지 스크린’이다.
간단하게 알베르티의 그리드를 떠올려보자. 그리드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화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대상이 있다. 표상의 관계에서는 화가가 그리드를 통해 대상을 바라보지만, 응시의 관계에서는 대상이 그리드를 통해 화가를 바라본다. 결국 두개의 시선이 그 그리드에서 만나는 셈이다. 그 그리드를 ‘이미지-스크린’이라 부르기로 하자. ‘스크린’이라는 말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뭔가 볼거리를 제공하는 평면이자, 동시에 절대로 봐서는 안될 것을 차단하는 막이기도 하다.
“가시적인 것의 장에서 대상 a는 응시다.” 여기서 ‘대상 a’란 내 안에 있는 타자(autre)를 가리킨다. 편의상 그것을 대충 무의식적 욕망이라 부르기로 하자. 그것은 상상계(l’imaginaire)나 상징계(le symbolic)로 기입되거나 동화될 수 없는 실재계(le réel)를 가리킨다. 한마디로 나를 위협하는 ‘응시’는 바로 이 실재계가 나를 쏘아보는 현상이다. 하지만 인간은 회화와 예술이라는 ‘이미지-스크린’으로 이 실재계의 응시를 차단하고, 그것을 길들인다는 것이다. 매우 독특한 회화론이다.
‘대상 a'는 분명히 존재(present)하지만 상상계나 상징계에 표상(represent)될 수는 없다. 그것이 계속 자신을 주장해도 그것을 표상할 방법은 없기에, 주체는 자기도 모르게, 마치 자동인형처럼, 강박적으로 반복행동을 하게 된다. 이를 라캉은 ‘오토마톤‘(automaton)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이 의식되지 않는 증상의 수준을 넘어 불현듯 의식의 차원으로 침입해 들어올 때, 주체는 커다란 충격과 더불어 외상(trauma)을 체험하게 된다. 이 돌발적 사건을 라캉은 ‘투케’(tuche)라 부른다.
그때 주체를 엄습하는 그 섬뜩함을 흔히 ‘언캐니’라 부른다. 프로이트는 거기에 ‘낯익은 낯섦’이라는 모순적 규정을 준다. 하지만 불어에는 독일어(heimlich=unheimlich)나 영어(canny=uncanny)처럼 접두사를 이용해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표현할 만한 단어가 없다. 그래서 라캉은 내밀함(intimité)에서 안을 의미하는 ‘in’을 떼내고 밖을 의미하는 ‘ex’를 붙여 ‘외밀함’(extimité)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섬뜩함은 곧 내 속의 타자, 내 안(in)에 들어와 있는 외부(ex)가 돌연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상을 얻기 위한 역투사
‘왜상’에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왜상을 얻으려면, 원근법적 묘사와는 반대로 역투사를 해야 한다. 한마디로 화가가 대상을 보는 방향이 아니라, 거꾸로 대상이 화가를 응시하는 방향으로 투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왜상은 그 자체가 사물의 ‘응시’를, 말하자면 ‘대상 a’의 응시를 상징하는 셈이다. 라캉의 회화론에 따르면, <대사들>은 이미지-스크린으로서 응시를 길들이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왜상은 대상의 응시를 대변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쏘아보는 두개골, 어두운 죽음의 충동이다.
<대사들>의 두개골은 그림의 옆에 바짝 붙어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쳐다봐야 제 모습이 나타난다. 때문에 그 그림은 원래 계단 벽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정면에서 보면 두개골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그림은 라캉이 말한 ‘이미지-스크린’이 된다. 반면 계단을 오르면서 보면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지-스크린’이 사라지는 것이다. 대신 그 스크린을 뚫고 갑자기 두개골이 눈앞에 육박한다. 게다가 왜상의 효과로 인해 그것은 마치 공간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마디로 그 자체가 ‘투케’의 체험이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