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인왕산에 올랐다. 미국에서 온 존이라는 영화감독과 함께였다. 전날 내가 만든 뮤지컬을 그에게 보여줬고 함께 술을 마시다 의기투합하여 등산을 하기로 한 것이다. 존은 자신의 첫 번째 장편영화에 한국인 소녀가 주요 배역으로 캐스팅될 예정이어서 한국에 관심이 많은 친구였다. 인왕산 등산도 그의 제안이었다.
날은 조금 흐렸지만 오랜만의 산행이라 마음도 상쾌하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존과 나는 영화 만드는 것의 기쁨과 고달픔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산을 올랐다. 서울 성곽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능선까지 오르자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휴대폰의 카메라 기능을 작동시켜 사진을 찍으려 하자 존이 팻말을 가리켰다. “No Photo. 이 방향에서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몇 발짝 옆에서 군인 아저씨가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멀리 청와대가 내려다보여서 그런 것 같았다. 내가 투덜대자 존이 오히려 다독인다. “북한군이 넘어올까봐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러고보니 마침 다음날이 수십년 전에 김신조를 비롯한 수십명의 무장 공비들이 넘어와 청와대를 습격했던 날이기도 했다. 그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안방에서 구글 맵으로 북한의 미사일 기지까지 볼 수 있는 시절에 청와대로부터 수킬로미터나 떨어진 산등성이에서 등산객의 화질 구린 휴대폰 촬영도 용인하지 않는 깨알 같은 경비태세에 짐짓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방위 시절에 관악산 꼭대기 초소를 지키는 임무로 18개월을 보냈다. 매일 밤마다 막사에서 산 정상까지 두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며 두 시간씩 초소 경계 근무를 섰었다. 쥐새끼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 깜깜한 밤에 두 시간 동안 할 일이라고는 근무 수칙에 어긋나긴 하지만 부사수를 노래시키는 일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꼭대기까지 감찰 나오는 이도 없었다. 노래 듣기도 지치면 여자친구 얘기나 하며 시간을 때웠다. 고생스러운 임무도 아니었지만 전방도 아니고 이런 대도시 앞산에서 밤마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한심스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처음 올라봤지만 인왕산과 북악산은 선바위, 말바위 등 구비구비 기묘한 바위들로 곳곳이 절경이었다. 무엇보다 서울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여러 군데 갖춰져 있어 휴일 오후 생수 한병 들고 가볍게 등산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군사지역으로 묶여 있어 갈 수 있는 곳보다 갈 수 없는 곳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존은 자신이 살고 있는 LA에는 이런 산도 없다며 산행에 만족감을 표시했지만 나로서는 녹지나 공원도 그리 많지 않은 서울에서 이렇게 좋은 뒷산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것이 다소 아쉬웠다. 산림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인왕산과 북악산은 몇 군데의 초소를 제외하고 전면 개방해도 되지 않을까? 설마 아직도 45년 전처럼 북한 무장 공비가 인왕산을 걸어 넘어와 청와대를 습격하리라 생각하는 걸까? 설사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청와대에는 가카가 애용하시는 지하 벙커가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