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작가 뤽 들라예는 분쟁지역을 돌아다니는 포토저널리스트다. 80~90년대만 해도 그는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유고슬라비아, 르완다, 체첸 등 전장을 돌아다니며 매그넘과 <뉴스위크>를 위해 보도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와 그는 전쟁의 참상을 대형이나 중간 포맷의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그렇게 큰 촬영장비는 물론 전장의 급박함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촬영된 사진들은, 때론 디지털 보정을 거쳐, 큰 사이즈로 출력되어 미술관에 걸린다. 이렇게 보도사진과 예술사진의 경계가 무너질 때, 사진은 “기록-기념”(document-monument)이 된다.
그의 작품 <카불로 가는 길>은 미군에 사살당한 것으로 보이는 2구의 탈레반 사체를 보여준다. 사체의 주위에는 아프간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마치 남의 일 보듯 무심한 표정들이다. 첫눈에는 전형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보이나, 사진 속의 인물들의 눈은 촬영자를 향하고 있다. 이는 촬영자가 ‘거기에 없었던 듯’ 사건의 객관적 관찰자로 남아야 한다는 원칙의 위반이다. 사실 사진의 제재는 매우 끔찍하나, 사진 자체는 한폭의 타블로와 같은 인상을 준다. 여기서 사진은 보도를 넘어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에 견줄 만한 회화적 기념비가 된다.
대형 포맷이나 파노라마 카메라를 가지고 다닐 때, “결정적 순간”이라는 브레송/매그넘의 원칙은 유지될 수 없다. 다큐멘터리가 회화적 질을 추구할 때, 사진사는 ‘예상 못한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을 기다리기보다는 ‘기대하는 구도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큐멘터리라고 보도사진의 수준에 머물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은 미술관에 걸릴 정도의 질을 갖추고 있다. 뤽 들라예는 브레송이 그 방향으로 더 나아갔어야 한다고 말한다. 2004년 그는 매그넘을 떠나며 포토저널리스트이기를 포기한다. “포토저널리즘의 미래에 대해서 나는 관심이 없다.”
들라예는 “이미지의 자율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진은 다른 무엇이기 이전에 완결적 구조를 갖춘 미적 구조물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그의 제재가 결코 외적 고려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영역에서 나온다는 데에 있다. 가령 <역사> 연작에는 사살된 탈레반 병사의 사진이 있다. 죽은 병사의 주머니는 털려 있고, 누군가 그의 신발마저 벗겨갔다.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실제로는 끔찍한 참상이나, 다큐멘터리의 유미화(唯美化)는 그 참상마저도 한폭의 풍경화로 제시한다.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런 사진을 미술관에서 돈을 받고 판다는 데에 윤리적 문제가 없냐는 질문에, 그는 “그 문제는 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사이먼 노포크 역시 세계의 분쟁지역을 돌아다니며 전쟁 사진을 찍어왔다. 인종 학살, 제국주의, 대지와 전쟁의 공간, 전쟁과 첨단 미디어, 낡은 장비와 무기 등을 담은 사진을 통해, 그는 전쟁이 우리의 도시와 자연환경의 형태를 어떻게 바꾸고, 우리의 사회적 기억과 심리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탐구한다. 노포크는 특히 고대의 폐허를 묘사한 회화, 그리고 폐허의 의미와 은유에 관심이 많았다. 낭만주의 시대에 고대의 폐허는 인간의 유한성, 자연의 영원성, 죽음을 통한 양자의 궁극적 합일을 상징했다. 노포크는 이 18세기 폐허 취향을 사진으로 복구해낸다.
그의 사진 중의 하나는 폭격으로 파괴된 아마눌라 왕의 ‘개선문’ 근처에서 한 사내가 안내판에 기대어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18세기 폐허 그림의 전형적인 모티브로, 거기서는 여행자가 종종 우연히 발견한 폐허의 옆에 앉아서 상념에 잠기곤 한다. 작품의 회화적 아름다움은 일거에 관객의 숨을 막히게 할 정도다. 당혹스러운 것은 그 개선문을 파괴한 것이 ‘세월’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서정적 아름다움 속에서 문득 전쟁이라는 현실의 참혹함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 아마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파괴된 바그다드 북문을 담은 그의 사진은 마치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코로의 그림처럼 서정성이 느껴진다. 이렇게 기록사진과 예술사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노포크의 작품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고유의 시공간의 차원을 갖게 된다. 노포크는 사진이 기록의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취하는 이 고유한 시공간의 차원을 ‘크로노토피아’(chronotopia)라 부른다. 이는 미하일 바흐친에게 빌려온 용어로 “모든 서사와 모든 언어 행위의 바탕에 깔린 시공간적 매트릭스”를 가리킨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현실의 시공간을 기록하지만, 노포크의 사진의 시공간은 현실을 초월한다. 거기서는 고대와 현재라는 상이한 두 시간, 이스라엘과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상이한 두 장소가 하나로 어우러져 제3의 시공간적 매트릭스가 탄생한다. 파괴된 아마눌라의 개선문은 노포크의 카메라에 담기는 순간 현실의 시공간을 떠나, 허구의 시공간 속으로 자리를 옮긴다. 목가적 전원의 서정과 잔혹한 전쟁의 기록은 서로 충돌한다. 폭격으로 파괴된 현장을 한폭의 낭만주의 풍경화로 보는 데에는 어떤 윤리적 불편함이 따른다.
아르카디아에도 내가
수잔 메이젤라스의 사진에서 고즈넉한 니카라과의 풍경을 보던 관객은 시선이 정면의 이상한 물체에 닿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그것은 상체가 날아간 인간의 시신이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수도 마나과 외곽에서 찍은 것으로, 그 장소는 소모사 정권의 국민방위군이 정적을 처형하던 곳이었다. 하체는 부패해서 부풀어 올랐고, 상체는 척추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들짐승에게 뜯어먹힌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폭력적이면서 아름답고, 혐오스러우면서도 유혹적”인 사진이다.
이 사진은 <아르카디아의 목동>이라는 회화의 제재를 연상시킨다. 아르카디아의 목동들이 어느 날 우연히 버려진 고대의 무덤을 발견하는데, 거기에 ‘아르카디아에도 내가 있다’(Et in arcadia ego)라고 적혀 있다는 전설이다. 이 낭만적 메멘토 모리의 제재를 처음 사용한 게르치노의 그림에서는 두 목동이 우연히 주인 모를 무덤 위에 놓인 두개골과 마주친다. 목동들이 아르카디아의 이상향에서 불현듯 죽음과 마주치듯이, 메이젤라스의 사진을 보는 관객은 니카라과의 서정적인 풍경 속에서 불현듯 참혹한 현실과 마주치게 된다.
메이젤라스는 “인권 사진가”로서 ‘엘 모소테 학살’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1981년 미군의 훈련을 받은 엘살바도르 군대가 게릴라 소탕을 명분으로 1천명 이상의 양민을 학살한다. 좌익 게릴라들은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의 기자와 수잔 메이젤라스를 몰래 현장으로 부르고, 이들의 취재로 사건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다. 하지만 전쟁과 학살의 현장을 담은 이런 사진들은 종종 ‘기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다른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미학적 향유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그렇지 않았다면 속하지 않았을 장소에 존재하는 변명이다. 그것은 내게 동시에 연결의 지점과 분리의 지점을 준다.” 여기서 ‘연결’이란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액티비즘’을, ‘분리’란 타인의 고통을 냉정히 기록하는 ‘저널리즘’을 가리킨다. 다큐멘터리는 저널리즘을 넘어 액티비즘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 니카라과의 풍경은 저널리즘이 액티비즘이 아니라 유미주의로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보도사진이 미술관에 걸리면서 이 경향은 더 심화되고 있다. 어떤 사진은 타인을 위해 ‘행동’하고, 어떤 사진은 타인의 불행을 ‘관조’하며, 어떤 사진은 타인의 고통을 ‘향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