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1일. 마야 달력의 마지막 날엔 대통령선거 이틀 뒤의 우울한 여흥거리로 지구 종말론을 다뤘던 방송을 다시보기했다. 종말론에 심취한 청년의 안색은 창백하고 멸망의 날을 대비하던 또 다른 사내는 약속된 시간이 지나도 ‘들림’받지 못하자 겸연쩍은 표정으로 바닷가 방죽을 서성거렸다. 구원은커녕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단번에 망하는 일 따위도 여간해선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했으니, 새해도 밝은 참에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생존으로 흘러갔다. 타인의 편의에 기대 사는 연약한 대도시 문명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생존이란, 적어도 위급한 상황에서 무리에 폐를 끼치는 존재가 되고 싶진 않은 심정이랄까. 가스와 전기, 물이 끊긴 비상시에 온수로 씻고 싶다고 투덜대거나 남이 애써 피운 불을 꺼뜨리는 사람이 나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불을 피울 기술을 습득한다면 더 낫고.
SBS <생활의 달인> 무인도 생존대결 편에선 세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불을 피운다. 물이 담긴 페트병을 볼록렌즈 삼아 11월의 약한 태양광으로 불을 피우려는 남자는 한 시간가량 지나서야 간신히 불씨를 얻었고, 나무를 비벼 마찰열을 이용할 때 힘을 집중하는 자세를 알고 있는 이는 5분 만에 불을 피웠다. 만약 볕이 강한 여름이라면 페트병 남자는 힘들이지 않고 금방 불을 얻었을 것이고 나머지는 땀깨나 흘렸겠지. 나는 워낙에 게으른 자라 극한 상황에서도 더 간편하고 힘을 덜 들이는 법을 따지고 있었다. 무지에서 오는 비효율을 피하려면 하나라도 더 알아야 하는 법. 영국 특수부대 출신 생존왕 베어 그릴스의 <인간과 자연의 대결>(Man vs. Wild) 시리즈는 사막, 늪지, 빙원, 정글 가릴 것 없이 누비며 조난자가 생존하는 방법을 시연한다. 그의 생존술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지만 워낙 대단한 사람이다 보니 곧 다른 흥밋거리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가 즐겨하는 말, “이것은 좋은 단백질 공급원이죠”는 보호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생물을 에너지원 삼는 극한의 식성을 설명하기 제격이다. 같이 보던 이는 악어가 나타나자 큰일났다고 외쳤을 정도. 물론 악어가 큰일났다는 뜻이다.
생존 프로그램에 맛들이던 차에 반갑게도 SBS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이 새 시즌을 시작했다. 에콰도르의 아마존 무인도 생존체험, 와오라니족의 사냥법을 배우는 여러 미션들이 예고되었으나 <인간과 자연의 대결>에 이미 중독된 눈이라 처음엔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안데스 고산지대를 걷다가 적도에서 못 위에 달걀을 세우는 미션을 마치고 다음 여정을 떠나는 일행을 두고 내레이터 윤도현이 “안데스를 정복한 병만족”이라 표현했을 땐 그야말로 빵 터졌다. 정복이라니! 그렇지만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은 일반인 입장에서 공감할 구석도 상당하다. 허벅지 부근에서 찰랑거리던 수면이 5분 만에 가슴 위로 차올라 강 중간에 갇혔던 미르가 위험을 벗어난 뒤 터뜨리는 눈물. 무리를 이끌고 식량을 구하러 헤매다 돌아오는 길에 바나나를 발견하자 “우와! 익은 거! 바나나! 어허 노란 거!”라고 다급하게 외치던 김병만은 매운탕을 기다리며 라면사리를 씹고 있던 처자식에게 들으라는 듯 월척을 외치는 낚시터의 아버지 같았다. 바나나를 운반하던 노우진이 “꼭 마트 쇼핑 갔다 오는 것 같다”며 야생과 문명을 오가는 감상을 말할 때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병만이 집(대나무를 쪼개 만든 평상)을 지을 때의 배경음악 <We Built This City>도 ‘정복’마냥 가당찮아 깔깔 웃었으나 기분만은 도시를 세우는 것 못지않겠구나 싶더라. 모처럼 싹튼 생존에 대한 관심을 오락으로 몽땅 휘발시킬 때쯤 <SAS 서바이벌 백과사전>에서 안심이 되는 구절을 찾았다. ‘동료를 실망시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존의지를 강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음, 그것만큼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