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지주의자들 한 사람에게 가시적 우주는 환영 혹은 궤변에 불과했다. 거울과 부성(父性)은 혐오스럽다. 그것들은 이 궤변을 증식하여 산포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단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1940)에 등장하는 인용문이다. 물론 이는 존재하지 않는 해적판 백과사전에서 가져온 사이비 인용이다. 아무튼 거울에 사물이 비치는 것과 아비가 자식을 낳는 것을 똑같이 환영의 ‘복제’로 파악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 단편 속에서 보르헤스는 이 문장 덕분에 ‘틀뢴’이라는 이상한 가상의 세계를 알게 된다.
존재와 생성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가 같은 강물에 두번 몸을 담글 수는 없다”고 말했다. 강에는 늘 물이 흐르나, 우리가 보는 물은 실은 매번 다른 물이다. 강물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물도 마찬가지다. 자연의 모든 것은 한순간도 그전의 순간과 같을 수 없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신체를 이루는 개개의 세포들은 실은 태어났다가 죽기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의 강물이 어제의 강물이며, 오늘의 나무가 어제의 나무이며,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라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다른 것을 같은 것이라 말하는 것일까?
반면 파르메니데스는 생성과 소멸을 부정한다. “어떻게 존재자가 소멸할 수 있으며, 생겨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생겨난 것이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이 (앞으로) 존재할 것이라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성은 사라지며, 소멸은 자취를 감춘다.” 결국 ‘무(無)는 그 정의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세상에 무(無)란 없으며, 따라서 세계에는 오직 유(有)만 있다’는 얘기다. 파르메니데스는 여기서 ‘고로 생성이나 소멸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생성이나 소멸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이 두 철학자는 우주를 바라보는 두개의 대립되는 시각을 대표한다. 하나는 그것을 ‘존재’(Sein)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생성’(Werden)으로 보는 것이다. 서양철학의 토대를 놓은 플라톤은 물론 ‘존재’의 철학자였다. 그에게 우주의 진정한 실체는 영원불변하는 이데아의 세계였다. 설사 자연에서 우리가 생성과 소멸을 본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그저 감각에 비친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플라톤 역시 앞의 영지주의자처럼 거울이나 그림으로 이 환영을 증식시키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것을 그는 ‘시뮬라크라’라 불렀다.
우리가 ‘오늘의 강물이 어제의 강물과 같으며, 오늘의 나무가 어제의 나무와 같으며,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 플라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 모든 변화에도 뭔가 변함없이 동일한(identical)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리라. 그것을 우리는 사물의 ‘동일성’(identity), 혹은 ‘정체성’이라 부른다. 한마디로 플라톤 이후 2500년에 걸친 서양철학의 역사는 바로 이 동일성의 철학이었다. 그렇다면 ‘생성’의 관점에서 우주의 모든 것이 자기와 동일한 게 아니라 늘 자기와 차이(difference)가 나는 것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흐뢴과 우른
보르헤스가 접한 가상세계 ‘틀뢴’은 그 차이의 철학이 극단적으로 적용되는 세계다. 가령 틀뢴의 언어에는 아예 명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나라의 남부에서는 명사가 동사로 대체된다. 그리하여 ‘달(moon)이 떴다’고 말하는 대신에 ‘달했다’(mooned)라고 말한다. 북부에서는 명사가 형용사로 대체된다. 거기서 ‘달’은 ‘어둠 속의 둥글고 투명하게 밝음’이라 불린다. 명사가 없다는 것은 곧 실체, 즉 사물의 동일성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세계에서는 사물이 존재하는 대신에 사건이 생성될 것이며, 그 사건은 일회적이어서 매번 고유할 것이다.
틀뢴은 버클리류의 완전한 관념론의 세계다. 이 영국의 주교에 따르면 ‘존재는 지각되는 것’(esse est percipi)이다. 고로 눈앞의 사물도 등을 돌리는 순간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돌려도 사물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전능한 신이 늘 세계를 지켜보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틀뢴에는 버클리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지각하는 눈이 없거나 정신에서 망각되는 순간 사물은 존재가 지워지고 만다. “고전적 실례는 거지가 방문하는 한에서만 출입구가 존재하는 것이다. 때로는 몇 마리 새나 한 마리의 말이 원형극장의 폐허를 구하기도 한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런 세계는 패러독스로 가득 차 있다. 가령 X가 화요일에 철로에서 동전을 잃어버리고, Y가 목요일에 그것을 다시 찾았다 하자. 그렇다면 존재하던 동전이 화요일에 사라졌다가 목요일에 다시 존재하게 됐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틀뢴에서는 이게 패러독스가 아니다. 아니, 틀뢴의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X가 잃어버린 동전과 Y가 찾은 동전이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려 ‘동전을 찾았다가 발견했다’는 말 자체가 동전의 동일성을 가정하는 선결문제의 전제의 오류라고 지적할 것이다.
틀뢴에서 잃어버린 물건이 이중화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가령 두 사람이 하나의 연필을 찾는다고 하자. 한 사람이 연필을 발견하고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이어서 다른 사람도 그 연필을 발견한다고 하자. 이 경우 틀뢴에서는 똑같은 연필이 또 하나 생긴 것이다. 이 이중화한 연필을 틀뢴에서는 ‘흐뢴’(hrön)이라 부른다. 건망증과 정신의 산만함이 존재를 증식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 흐뢴은 또 다른 흐뢴을 낳고, 그것이 또 다른 흐뢴을 낳으며 끝없이 증식한다. 하지만 흐뢴보다 더 요상한 것은 ‘우른’(urn)으로, 이는 희망에서 암시를 통해 생겨난다.
잠재성과 현재성
동일성 없이 차이들만 존재하는 틀뢴은 니체가 주장하는 ‘생성’의 형이상학이 지배하는 세계다. 그의 뒤를 이은 들뢰즈도 보르헤스의 이 단편을 읽었을 것이다. <잠재성과 현재성>이라는 글을 인용해보자. “철학은 다수성의 이론이다. 각각의 다수성은 잠재적(virtual) 요소와 현재적(actual) 요소를 포함한다. 순전히 현재적인 대상은 없다. 각각의 현재적인 것은 잠재적 형상들의 안개로 감싸여 있다. 이 안개는 잠재적 형상들이 산포•순환하는 (…) 원환들에서 피어오른다.” 이는 연필이 (끝없이 산포•순환하는) 흐뢴들과 중첩된 상태로 존재하는 틀뢴을 연상시킨다.
“하나의 입자는 덧없이 짧은 것(Ephemeres)을 만들어내고, 하나의 지각은 기억들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 원환들이 더 좁아져서, 잠재적인 것이 현재적인 것에 근접해 점점 더 그것과 구별할 수 없게 될 때에는, 그 반대의 운동도 볼 수 있다.” 여기서 들뢰즈는 “반대의 운동”, 즉 잠재적인 것이 현재적인 것으로 전화하는 현상을 지적한다. ‘우른’은 그렇게 희망이라는 잠재성이 암시를 통해 현재성으로 태어난 것이다. 또 다른 단편 <원형의 폐허>에서 보르헤스는 꿈으로 형상을 빚어 아들을 얻은 어느 늙은 사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의 결말에서 노인은 불에서도 타지 않는 제 몸을 보며 불현듯 자신도 타인이 꿈으로 빚은 환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마 그를 꿈꾼 사람도 타인의 꿈일 것이며, 다시 그 사람도 또 다른 타인의 꿈일 것이다. 그렇게 계속 무한히(ad infinitum). “거울과 부성(父性)은 혐오스럽다.” 이 영지주의자의 말은 곧 플라톤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니체와 들뢰즈는 거울과 부성을 혐오하지 않는다. 그들은 생성과 소멸의 원환을 순환하는 이 영원한 시뮬라크르의 놀이를 긍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