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8일 컴퓨터 예술의 선구자인 가와노 히로시 선생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컴퓨터가 아직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던 시절에 그 거대한 계산기로 그림을 그린다는 발상을 한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것이 벌써 몇달 전의 일.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에 한두번은 더 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시간은 그것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1992년 그의 저서를 허락도 없이 번역, 출판한 것이었다. 굳이 변명하자면 당시에 이런 식의 해적출판은 학계와 출판계의 관행이었다. 아무튼 “안 팔릴 것”이라고 반대하는 출판사를 “이 책은 반드시 내야 한다”고 우겨서 어렵게 책을 출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출판사의 예측대로 책은 그리 많이 팔리지 않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 책(<예술 기호 정보>)이 한국에서 출간된 최초의 컴퓨터 예술 관련서다.
무슨 생각으로 그 책을 번역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소비에트의 기호학으로 대학원 논문을 쓴 직후이니, 그 과정에서 소비에트의 사이버네틱스와 막스 벤제의 정보미학을 접하고, 자연스레 컴퓨터 예술로 관심이 갔던 것으로 보인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혼자서 ‘사이버네틱스 공산주의’를 몽상하던 시절, 시커먼 도스 화면에 컴퓨터를 종료하면 자동으로 <인터내셔널가>가 흘러나오게 프로그래밍(?)했던 기억이 난다.
컴퓨터 예술의 시작
한동안 그의 책을 잊고 지내다가, 1988년 일본에서 공부하는 지인을 통해 우연히 그가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거의 은둔생활을 하는 분이라, 어렵게 연락처를 수소문하여 마침내 도쿄 외곽의 어느 카페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이미 여든을 훌쩍 넘긴 그는 수전증으로 손을 떨고 있었다. 그를 만나자마자 먼저 허락도 없이 책을 번역한 데 대해 사과부터 했다. 그는 나의 죄를 흔쾌히 사하여 주며, 외려 책을 번역해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몇 차례 더 방문해 그와 인터뷰를 했고 그 결과물을 묶어 <컴퓨터 예술의 탄생>(2008)이라는 책을 냈다. 2010년에는 내가 관여하는 ‘기술미학연구회’라는 단체에서 그를 포럼에 연사로 초청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먼저 한국의 청중에게 고개 숙여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부터 했다. 일제 강점기에 만주에 살았던 그는 패전 뒤 일본으로 돌아가는 기차의 창밖으로 나무가 하나도 없는 한국의 민둥산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에 오자마자 그는 먼저 산이 푸른지부터 확인했다.
그 뒤 한국과는 아무 관계없이 살았다는 그에게 한국과 관련한 또 다른 기억이 있다. 그가 도쿄대 미학과의 조교로 일하던 시절, 과사무실을 드나들던 한국 유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10여년 뒤 미국을 방문한 길에 그 학생을 다시 만나는데, 그사이에 그는 그곳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요즘 뭐 하고 지내냐’고 안부를 묻자, 그 괴짜는 킬킬거리며 ‘요즘 TV로 작곡을 한다’고 대답했단다. 그 학생의 이름은 물론 백남준이다.
그는 컴퓨터로 공산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의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이 사이버네틱스 공산주의는 물론 당 관료들의 독재체제가 아니다. 그저 컴퓨터를 계획경제의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체제도 아니다. 그에게 진정한 공산주의란, 인민대중이 프로그래머가 되어 컴퓨터로 작품을 제작하고, 물건을 생산하고, 학교와 공장과 사회 전체를 기획하는 사회였다. 컴퓨터는 자유로운 개인들에 의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는 이를 컴퓨터의 ‘공리주의 원칙’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뒤 컴퓨터 문화는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자본주의의 컴퓨터 산업은 대중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소비자로 만들었다. 대중은 자신들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고 말하나, 그가 보기에 대중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외려 그것들에 사용당할 뿐이다. 이 불편함은 그로 하여금 이후 일체의 IT기기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바틀비식 ‘거절’인 셈이다. 그는 휴대폰과 이메일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그와 연락하려면 서툰 일어로 전화를 걸거나 손으로 편지를 써서 부쳐야 했다.
그는 내 앞에서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얘기했다. 초기의 바우하우스는 사회주의적 이상을 공유하는 디자인 장인들의 중세적 길드 조직으로 출발했다. 60년대만 해도 아직 장인적 컴퓨팅이 가능했을 것이다. 컴퓨터 문화의 초기라 프로그래밍 자체가 간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프로그래밍은 장인적 수준에서 산업적 수준으로 이행했다. 오늘날 쓸모있는 컴퓨팅은 대자본의 도움을 받아 거대한 산업의 차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정교한 분업으로 이루어진다.
60년대의 컴퓨터 예술가들은 직접 프로그래밍하여 대학이나 기관의 전산실에서 이미지를 만들어야 했다. 이들이 컴퓨터 예술의 1세대를 이룬다. 80년대 이후 작가들은 PC 위에서 그래픽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이용하여 굳이 프로그래밍을 하지 않아도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이들이 컴퓨터 예술의 2세대를 이룬다. 이때만 해도 PC는 소수 전문가 그룹을 위한 도구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아예 대중이 그래픽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다루게 된다. 이것이 컴퓨터 예술의 3세대다.
70년대 후반, 가와노 선생을 비롯한 1세대 컴퓨터 예술가들은 “더이상 우리가 할 일이 없다”며, 컴퓨터 예술의 실험에서 손을 뗀다. 다만, 같은 세대에 속하는 프리더 나케만은 80년대 이후 인터페이스 디자인으로 전향함으로써 컴퓨터 예술의 2세대에 합류한다. 그래픽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새로이 컴퓨터 예술의 실험을 계속할 생각은 없느냐고 묻자, 그는 “더이상의 발전을 따라갈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장인적 컴퓨팅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이 거절에는 철학적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디지털 영상의 본성을 묻다
그는 하이데거를 인용하여 ‘탈은폐’(aletheia)의 계기를 강조했다. 초기 컴퓨터 예술에는 컴퓨터의 감추어진 잠재력을 벗겨내는 측면이 있었다. 가령 1세대 컴퓨터 예술은 컴퓨터가 아직 계산기였던 시절 그것이 영상매체가 될 가능성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구입해 이미지를 만들 때, 그런 탈은폐의 가능성은 극도로 제한된다. 또 직접 프로그래밍을 했던 1세대 컴퓨터 예술가들은 디지털 영상이 문자숫자 코드로 된 텍스트임을 늘 의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로그래밍 없이 이미지를 만들 때 디지털 영상의 본성은 쉽게 망각된다. 일종의 ‘존재망각’에 빠지는 셈이다.
컴퓨터 예술의 실천을 그만둔 뒤 가와노 선생의 관심은 컴퓨팅 이론으로 옮아간다. 현재의 컴퓨팅이 근본적으로 ‘탑다운’의 방식이라면, 그가 연구하는 병렬분산형 컴퓨팅은 뉴런의 연결로 이루어진 인간의 뇌처럼 ‘네트워크’로 작동한단다. 그와 가진 마지막 인터뷰는 나의 질문으로 끝났다. “여러 대의 컴퓨터를 병렬접속해도 결국 그 자체가 거대한 튜링 머신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미 시간이 너무 늦어 그날 그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다음 만남에서 그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으나, 이제는 영영 대답을 들을 길이 없어진 셈이다.
한국의 음악이 듣고 싶다고 하셔서,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러 ≪영산회상≫을 포함해 국악 CD 몇장을 골라 드렸다. 그것을 들으셨을까? 갑자기 그분에게 CD 플레이어도 없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와노 히로시. 최초의 컴퓨터 예술가이자 최후의 공산주의자. 그분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