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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TVIEW] 꿈이 필요해

KBS <학교 2013> 속 십대의 지옥도를 보다 미안함을 느끼다

교정의 은행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을 놓치지 않고 손으로 받으면 원하는 대학에 바로 붙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보충수업을 마친 뒤 저녁을 후다닥 먹어치우고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 은행나무쪽으로 바람이 부는 모습을 절박한 눈으로 좇던 고3의 가을이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대학은 꼭 가야 한다고 배웠고, 하루가 평생을 결정짓는다는 수능이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가슴을 죄는 것 같은 두려움과 마주하는 나날이었다. 불시에 이뤄지던 소지품 검사에서 삐삐 몇개를 찾아낸 담임은 매를 들어 비밀번호를 불게 했고, 점수에 따라 종아리에 가로줄 멍이 선명하도록 맞기도 했다. 머리카락 길이나 구두 굽의 높이에 대한 단속은 엄격했지만, 전교에서 촌지를 받지 않는 선생님이 손에 꼽힌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서울 강북의 흔한 사립여고, 그나마 성적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덜 치이고 살았던 내게도 고등학교 시절의 좋은 추억은 그리 많지 않다.

졸업 뒤 뒤를 돌아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대입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이상은 특히, 그 3년의 시간이 그립지 않았다. 그래서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자주 잊는다. 누구나 다니는 학교가, 때 되면 졸업하는 학교가 누군가에게는 매일 전쟁이고 지옥일 수 있다는 사실을. 한해 평균 158명의 청소년이 자살을 택하는 나라에서 학교는 그저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통스러운 곳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날 때부터 스무살이었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그전까진 없는 인생이니까.” KBS <학교 2013>에서 치맛바람 센 엄마에게 지친 모범생 민기(최창엽)가 한숨처럼 내뱉은 말이 가슴에 아프게 와 박힌 것도 바로 내가 겪었던 마음의 지옥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야심 강한 교장은 학교의 성적과 평판을 끌어올리기 위해 “질 나쁜 애들은 거르고 가겠다”고 선포하고, 학생을 훈계하다 도리어 팔목을 꺾인 교사 정인재(장나라)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라며 좌절한다. 장애를 지닌 영우(김창환)가 일진 정호(곽정욱) 패거리의 ‘빵 셔틀’로 시달리다 문제를 일으켜 쫓겨나듯 전학당할 뻔하고, 전교 1등 하경(박세영)이 시험 기간에 각성제와 카페인 음료를 섞어 마셨다가 응급실에 실려가기까지, 승리고 2학년 2반 서른네명은 학교에서 각자의 지옥을 통과한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서부터 수습해나가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이 세계에서 일말의 희망을 보는 것은 역시 사람 때문이다. 영우가 자신에 대한 험담을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 손바닥으로 귀를 덮어주고, 반을 떠나는 영우를 위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시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남순(이종석)은 멜로드라마 속 안하무인 재벌 2세보다 훨씬 가슴 설레게 하는 사내아이다. 특목고생만 받는 학원에 거짓말을 하고 다닐 만큼 성적에 집착하는 하경도 사실은 친구가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봐 겁내는 아이일 뿐이다. 무엇보다, 시험 문제가 든 USB를 훔쳐 해답을 공유하고도 잘못이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반 아이들 앞에서 빗자루를 들었다 떨어뜨리고 제 손바닥으로 수십명의 손을 때리던 정인재의 눈물에는 전염성이 있다. 극소수만이 승자가 되는 무한 경쟁 시스템 안에 내몰려 성장할 기회와 공감능력마저 잃어가는 아이들에 대해 “나도 그렇게 가르치고, 부모도 그래라 그래라 하고, 학교도 어쩔 수 없다 하고, 그렇게 내버려두는데 애들이 무슨 잘못이겠어요”라며 자책하는 그를 보고 있으면 문득 눈물이 고이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의 인권은 교사가 보장해주는 것”이며 “동성애는 학교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내가 사는 도시의 교육감으로 뽑히고 만 오늘, 정인재 선생님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지금 너희에게 필요한 건 꿈이다. 공부는 좀 못해도 되지만 꿈이 없으면 버틸 힘이 없어진다.” 아이들에게도, 아이들에게 이런 세상밖에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한 어른인 내게도 정말 그렇다. 버텨서 살아남기 위해, 지금은 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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