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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마술을 믿습니까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3-01-04

신중세주의와 디지털 테크놀로지

‘신중세주의’(neo-medievalism)라는 말이 있다. 이는 헤들리 벌이 <무정부적 사회>(1977)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 ‘세계화’로 인해 개별국가들의 주권이 점점 더 침식당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과거에는 한 국가가 자신의 영토 내에서 절대적 주권을 행사했으나, 오늘날 한 국가의 주권은 나라 밖의 다양한 기구나 조직의 정치적, 경제적 간섭을 받는다. 가령 유럽연합을 생각해보라. 이 상황은 하나의 영토 내에 황제와 교황과 제후와 그 밖의 다양한 세력의 주권이 어지럽게 중첩되어 있던 중세를 닮았다.

중세에서 꿈꾸기

이 정치학 용어를 문화의 영역에 끌어들여 새롭게 대중화한 것은 움베르토 에코이리라. 에세이 <중세에서 꿈꾸기>(1986)에서 그는 말한다. “현재 우리는 유럽과 미국 모두에서 중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시기를 목격하고 있다. 그것은 기묘하게도 환상적 신중세주의와 책임있는 문헌학적 조사 사이를 오가고 있다.” 에코 자신이 쓴 <장미의 이름>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중세의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 추리소설의 바탕에는 중세에 대한 진지한 문헌학적 연구가 깔려 있다.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신중세주의는 문헌학적 연구와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소설, 영화, TV 혹은 비디오 게임에서 중세적 판타지가 화려하게 귀환하는 것을 보고 있다. 가령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를 생각해보라. ‘신중세주의’라고 무조건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의 중세적 특징이다. 가령 <가위손> <찰리와 초콜릿 공장>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의 악몽> 등 팀 버튼의 동화적 상상은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인해 ‘네오고딕’이라 불린다.

최근 들어 중세적 판타지를 가장 빈번히 활용하는 곳은 컴퓨터 게임 영역일 것이다. 캐릭터의 복장, 전쟁의 서사 등 모든 면에서 중세는 컴퓨터 게임을 위한 탁월한 배경을 제공해준다. 컴퓨터 게임은 마치 타임머신처럼 무미건조한 ‘산문적’ 사회의 현대인들을 아직 아슬아슬한 모험과 가슴 뭉클한 낭만이 있었던 ‘운문적’ 사회로 데려간다. 컴퓨터 게임의 중세는 물론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중세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차라리 중세에 대한 막연한 동경, 현대인의 꿈속에 자리잡은 새로운 유토피아에 가깝다.

중세에 대한 이 관심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사실 ‘중세주의’는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늦어도 18세기 이후 ‘현대’에와 ‘계몽’과 ‘이성’에 반발하는 곳에서 중세는 늘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해왔다. 가령 ‘낭만주의’(romanticism)라는 말 자체가 중세의 기사문학을 가리키는 로맨스(‘romance’)에서 비롯됐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네오고딕’ 역시 팀 버튼의 영화 이전에 이미 18∼19세기에 영국의 건축양식으로 존재했다. 이 건축 운동은 문학에도 영감을 주어 같은 시기의 영국 문단에 ‘고딕소설’의 유행을 낳기도 했다.

19세기의 독일의 ‘나자렌느 파(派)’는 피상적인 장인성에 매몰된 신고전주의를 비판하며 예술의 영적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중세 후기와 초기 르네상스로 돌아가려 했다. 영국의 ‘라파엘 전파’는 라파엘 이후에 등장한 마니에리스모의 기계적 화풍에 반대하여 라파엘 이전의 콰트로첸토로 돌아가려 했다. 윌리엄 모리스의 ‘예술과 공예운동’은 산업화에 반발하여 중세의 공예로 되돌아가려 했다. 산업디자인의 대명사가 된 바우하우스조차 초기에는 산업적 디자인의 조악함을 극복하기 위해 중세적 길드를 표방한 바 있다.

오늘날 ‘네오’라는 접두사를 달고 중세주의가 부활한 것 역시 대중이 이 사회에 뭔가 불편함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이는 중세가 부활한 이유를 “현대의 헷갈리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사건들을 간단하게 해명해주는 낭만적인 역사물에 대한 필요”에서 찾는다. 현대사회는 한 사람의 영웅적 행위로 바꾸기에는 너무나 거대해졌고, 한 사람이 이성으로 악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해졌다. 여기서 이 사고와 행위의 무력감은 어떤 보충물을 요구한다. 그 허구적 보충물로 나타난 것이 중세적 환상과 서사라는 얘기다.

과거의 ‘중세주의’와 현재의 ‘신중세주의’의 성격을 놓고 논란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신중세주의가 과거의 중세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고, 어떤 이는 신중세주의란 그저 과거의 중세주의가 포스트모던이라는 새로운 맥락 속에서 다시 등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확실한 것은 최근에 등장한 신중세주의가 실제로 ‘포스트모던’이라 불리는 정신적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모던에 대립된다는 면에서 모던의 이전(premodern)과 이후(postmodern)가 상동성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가재걸음>(2005)에서 에코는 현대와 중세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실제로 중동에서는 새로이 ‘십자군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을 일으킨 부시는 자신의 전쟁을 “신적 사명”이라 불렀고, 이에 대항하는 모슬렘들은 자신들의 저항을 “지하드”(=성전)라 부른다. 미국에서는 진화론이라는 ‘가설’ 대신에 학교에서 ‘지적 설계론’을 가르쳐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지적 설계론이란 물론 창조론의 현대적 이름에 불과하다. 그 반대편에서는 꽤 이름이 높은 이슬람의 어느 성직자가 포켓몬을 금지시켰다. 포켓몬에 진화론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는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정보 전달의 플랫폼이 바뀌면서 대중의 의식에도 변화가 생긴다. 계몽의 시대는 대중에게 책을 읽혔지만, 오늘날 정보는 더이상 읽는 것(text)이 아니라 보거나(image) 듣는 것(sound)이 되었다. 쉽게 말하면 라틴어 성경책을 못 읽는 대중에게 성화를 그려 보여주고, 탁발승단이 무지한 대중에게 구술체의 설교를 들려주던 중세와 비슷한 상황이 된 것이다. 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서는 디지털 시대에 텍스트의 신성함을 고집하는 인문학 연구자들의 집단은 중세의 수도원과 비슷해질 거라 말했다.

기술적 마술

이 모든 변화의 또 다른 원인으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성격을 지적할 수 있다. 플루서의 말대로 오늘날 우리가 가진 기술은 산업혁명의 그것과 달리 거의 마술적 성격을 지닌다. 오늘날 우리는 픽셀을 조작하여 존재하지 않는 피사체를 존재하는 양 제시할 수 있고, DNA를 조작하여 원본과 똑같은 복제를 만들거나, 신화에나 등장할 만한 키메라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 나노 수준의 물질을 조작하여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한마디로 마술과 기술을 가르던 경계가 사라진 셈이다.

지난달 신문에서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영화에서나 가능했던 <해리 포터>의 ‘투명망토’가 현실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연구재단은 연세대 김경식 교수 연구팀이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특성을 갖는 ‘스마트 메타물질’을 이론적으로 제안하고 ‘스마트 투명망토’를 실험적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26일 밝혔다.” 그 얼마 뒤인 지난 12월11일 미국 <CNN>에서도 “<해리 포터>에서 나오는 투명망토와 비슷한 소재의 투명한 망토를 한 군사업체가 개발했다”고 보도했다.

‘계몽’은 마술은 미신이라 가르쳤으나, 이제 기술적 이성 자체가 마술의 수준에 이른 것이다. 대중의 정신이 허구와 현실이 뒤섞인 중세적 의식으로 되돌아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말대로, ‘중세인가, 포스트모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