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심각한 야행성이었다. 오후와 저녁 내내 멍하니 지내다가도 자정을 넘기면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고 손끝의 감각이 되살아나면서, 밤의 괴물로 변신했다. 밤의 괴물이 되어서도 하는 일은 별로 없다. 밖으로 나가서 누군가를 물어뜯거나 하는 일은 없고, 방에 혼자 앉아 손톱을 물어뜯으며 수선스럽게 이런저런 일들을 한다. 음악을 듣다가 책을 보다가 글을 쓰다가 누군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시계를 보면, 어이쿠, 벌써 새벽 여섯시야? 하며 서둘러 잠을 잔다. 대학 때는 야행성으로 인해 오전 수업은 거의 다 빼먹었고, 군에 있을 때조차 야행성이었고, 회사에 다닐 때도 야행성이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나 같은 야행성 괴물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이 괴물들은 밤만 되면 초능력을 발휘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도저히 쓸 수 없는 분량의 글을 순식간에 써내며, 평소에는 들을 수 없는 음악 속 미세한 소리들을 잡아채며, 사소한 일들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다. 밤만 되면 스스로가 어쩐지 진화한 인간같이 느껴질 정도다. 물론 오후 1시쯤 잠에서 깨어나 머리를 쥐어박으며 이런 잠벌레 같은 인간이 다 있나 자학하고,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오고 말지만 말이다.
요즘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일찍 잠들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일단 체력이 좀 달린다. 새벽 4시가 넘으면 손끝이 떨리고 집중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하 참! 초능력을 얻으려면 체력이 필요하다니, 이런 뭣 같은 경우가 다 있나. 또 다른 이유는 초능력을 버리고 평범한 인간으로 살고 싶어서다. 초능력에 의지하는 대신 시끄럽고 환한 대낮에 어떻게든 집중하려 애쓰고, 사람들과 사이좋게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싶어서다. 가끔 급한 일이 있을 때면 밤의 초능력에 기대기도 하지만, 되도록이면 피하려고 애쓴다.
오늘은 나처럼 밤의 초능력을 숨긴 채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좋은 약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햇볕 강한 한낮에도 이 노래만 들으면 손끝의 감각이 살아나며 온갖 상념에 휩싸이게 되고, 갑자기 옛날 생각나고, 들리지 않던 소리들도 크게 들린다. 푸른새벽의 신보 ≪Blue Christmas≫에 들어 있는 노래, <깊고 고요한 밤>이 그 약이다. 밤의 숨결을 긁어내리는 듯한 스네어 소리와 한희정의 잠꼬대 같은 목소리를 듣고 나면 도무지 낮이 낮 같지 않다. 온 세상이 ‘밤의 불빛으로, 온 세상이 빠져나간 밤’으로 바뀐다. 주위의 모든 불이 사라지는 깊고 고요한 밤. 밤의 한가운데로 빠져든다. 왜 밤은 깊을까. 어째서 넓지 않고 깊은 것일까. 노래를 듣다보면 알게 된다. 푸른 바다 속 적막하고 고요하고 먹먹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 마음을 보게 된다. 거긴 깊다. 깊어서 좁지만 아늑하다. 몸을 웅크린 채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왜 나였는지, 알게 된다. 내가 왜 나였는지 아는 것, 내가 어떤 나인지 아는 것, 그게 진정한 밤의 초능력이다. 노래를 다 듣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푸른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