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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게` 계몽적인 기업이미지 CF들
2002-01-31

음, 이 계몽은 뭉클하군

한해가 막을 올릴 때면 으레 장밋빛으로 채색된 기업이미지 광고가 줄지어 브라운관을 수놓는다. 이를 의례적인 행사겠거니 하고 심드렁하게 본다면 ‘음, 좋은 얘기군’ 하는 수준에서 귓등으로 흘려보내기 십상이다. 그런데 신선한 환기의 효과를 안겨주고 있는 기업이미지 광고가 두편 있다. SK텔레콤 CF와 삼성전자 CF다.

이들 광고는 지난해 캠페인의 연장선에서 ‘사람과 사람, 그리고 커뮤니케이션’(SK)과 ‘또 하나의 가족’(삼성)을 주제로 이미지의 누적효과를 노리고 있다. 동어반복성의 시리즈물인 터라 아주 새로운 얘기를 들려주고 있진 않다. 게다가 두 CF는 이미 2001년 광고계 트렌드를 주도한 휴머니즘 계열의 대표주자로 배부르게 호평을 받았다. 클레이애니메이션이란 영상기법으로 가족애를 포근하게 속삭인 삼성전자 CF는 2001년 대한민국 광고대상 대상 수상작이다.

그러나 익숙한 얘기의 광고임에도 이번에 또 소비자의 마음을 흔들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새해 첫날을 기해 막을 올린 SK텔레콤 광고는 소박한 모양새로 대박을 터뜨렸다. 광고의 주요 비주얼은 어느 동네의 담벼락에 붙어 있는 ‘주차하세요. 제 차는 저녁 8시에 들어옵니다’라고 적힌 메모지. 거리를 걷다가 문득 이 벽보에 시선을 고정한 누군가의 시선을 대변하는 듯 카메라는 잠시 정지한 채 화면 가득 메모지를 비추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누굴까? 저렇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사람’이란 나직한 내레이션으로 벽보의 가치를 돋운 뒤 광고는 ‘사람과 사람,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란 기업의 슬로건을 내걸며 마무리를 짓는다.

이 CF는 사소한 일상풍경을 포착했을 뿐이다. 한데 15초의 짧은 영상이 지나간 다음 도심의 흔한 풍경이 자연스럽게 파노라마를 이루며 긴 잔상을 견인한다. 내 주차 공간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시로 휴지통, 화분, 심지어 ‘차 세우면 빵구’란 위협성 문구를 단 타이어 같은 폐기물 등을 골목의 주차 라인에 세워놓는 것 따위가 말이다. 오죽하면 저렇게 안간힘을 쓸까 하는 생각에 당연한 자기권리의 표시라 받아들이면서도 간혹 냉정하고 당당한 배척의 뜻이 살벌한 기분을 줄 때도 있다. 내 차가 들어올 때까지는 주차 공간을 내주겠다는 광고속 메모 한장이 액면 그대로 따진다면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겠지만 공감대를 형성했다면 이같은 주변 단상들이 아무래도 정나미 떨어지게 빡빡했다는 데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광고적인 화법에서도 이번 CF는 특별한 주목을 받을 만하다. 이웃의 작은 배려가 얼마나 따뜻한 감흥을 줄 수 있는가란 메시지는 바로 지금 감지했듯이 말로 풀어쓰면 고루한 교훈의 냄새를 팍팍 풍긴다. 그러나 작위성, 장식을 촘촘한 체로 걸러낸 채 사실적인 접근방식으로 도처에 널려 있는 골목 안 풍경을 가감없이 드러낸 이 CF의 영상은 함축적인 맛을 내며 익숙하면서도 참신한 관조의 시선을 유도한다. 특히 이 광고는 미지의 영역이 아니라 인지의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시청자의 허를 찌를 수 있는 발상의 지평이 있음을 새삼 일깨우고 있다.

삼성전자 CF는 대학합격의 당락에 따라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입시철에 맞춰 대학 낙방생의 얘기를 시의적절하게 끌어냈다는 점에서 공감을 사고 있다. 전작에 비해 이번 인형의 생김새는 다소 정교함이 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대학교 정문 앞에서 수험번호를 확인한 뒤 낙방임을 안 여학생이 수험표를 하늘에 던져버리며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은 장면, 그런 딸에게 화상통화가 가능한 IMT2000 단말기로 전화를 건 아버지가 곰인형을 내밀며 ‘우리 딸, 파이팅’ 하고 위로하는 대목 등은 선한 눈웃음을 자아낸다. 인간모델이 나와 같은 내용을 연기했다면 닭살 돋는 기분도 들었을 법한데 유아적임을 전제한 클레이애니메이션이란 표현기법 덕분에 예쁜 감동을 유도하는 힘이 있다.

두 기업이미지 광고는 모두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고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겠다는 데 커뮤니케이션의 지향점을 두고 있다는 측면에서 결국은 같은 말을 다른 방식으로 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 가족애 등을 논하고 있는 이들 CF의 얘기에 혹자는 가르침을 받는 기분이라며 하품을 내뱉을지 모른다. 개인적으로도 상업광고가 도덕, 계몽의 분위기를 띠는 것엔 별로 취미가 없다. 그러나 메시지의 내용이 바른생활에 관한 지당한 말씀이라고 해서 모두가 빛좋은 개살구는 아닌 것 같다. 두 광고는 우리 삶의 기본적인 미덕이자 상식을 말하고 있다고 보여지니까. 사실 이 정도로 잘난 척하지 않는 화법이라면 계몽 CF라도 기꺼이 귀를 기울일 용의가 있다.

조재원 I 스포츠서울 기자 jone@sportsseoul.com

⊙ 사진설명

1. 삼성전자 I 제작연도 2001년 광고주 삼성전자 대행사 제일기획 제작사 동진프로덕션(감독 김현준)

2. SK텔레콤 I 제작연도 2001년 광고주 SK텔레콤 대행사 TBWA 제작사 유레카(감독 김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