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하도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한마디. 딸을 키우는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2> 엔딩에서 처음 아이를 맡겼던 수호성한테 들은 첫마디다. 술집 아르바이트를 하다보니 돈은 많이 벌어와도 품성이 나빠진 딸은, 공부도 제대로 안 시켜주는 아빠가 미워서 성인이 되자마자 도망치듯 아무에게나 시집을 가버렸다. 무작정 골랐던 부자 상인의 사업이 망해버리자 애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결혼은 파탄이 나버렸고 결국 전무후무한 ‘이혼녀 엔딩’을 보게 되었다. 수호성의 품에 안겨서 찾아왔던 순수하던 아이가 세상사에 지치고 상처입은 것은 모두 나쁜 아빠 때문이었다. 수호성은 아이를 다시 하늘나라로 데려가면서 불쾌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뒤로도 게임을 여러 번 반복하며 많은 엔딩을 보았지만, 처음의 아픔을 잊을 수가 없다.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엔딩의 의미가 더 크다. 몇십 시간의 노력이 엔딩 순간 결판이 나는 것이다. 잘 풀리지 않은 딸의 운명에 엔딩 스크롤이 다 지난 뒤에도 10여분간 말도 못하고 멍하니 모니터만 들여다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환하게 웃으며 “아빠 너무 감사해요. 저 정말 행복해요”라는 말에 감격의 눈물을 글썽인다. 게임 이름은 <프린세스 메이커>지만 꼭 공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왕국에서 제일가는 마법사가 되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든 용맹을 드날리는 장군이 되든 바라는 건 딸의 행복뿐이다. 엔딩에 희비가 엇갈려 울고 웃는 게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고고 프린세스>는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를 바탕으로 만든 보드게임이다. 보드게임이란 말이 낯설겠지만 한때 인기있었던 <부루 마블>을 떠올리면 된다. <고고 프린세스>는 나라 전체가 말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어진 퀘스트마다 목적지에 먼저 도달해야 한다.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수대로 말판에서 이동하고, 어느 칸에 멈추었느냐에 따라 아르바이트, 수업 등을 통해 돈을 벌고 능력치가 올라가며 때로는 이벤트도 벌어진다. 많은 퀘스트를 거치다보면 결국 엔딩에 이르는데,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 키워왔냐에 따라 엔딩 역시 달라진다.보드게임만큼 하는 사람을 불타오르게 만드는 게임은 없다. 둘러앉아 주사위를 던지면서 누가 먼저 가나 다투는 자체가 사람의 경쟁심을 극도로 끌어올리는데다가 그 결과 엔딩까지 달라지니 더욱 열을 올리게 된다. 직접 대면해서 하는 건 아니지만 네트워크 플레이도 지원되므로 여럿이 즐길 수 있다. 실제 모여앉아 하는 것보다 현장감은 떨어지지만 대신 다양한 이벤트와 비주얼 효과가 있다.언젠가 백화점에 갔다가 조그마한 가방을 메고 엄마 손을 잡고 가는 꼬마 아가씨를 본 적이 있다. 가방에 그려진 강아지 그림이 너무나 귀여워서 같이 있던 친구에게 나도 모르게 “저기 좀 봐. 너무 예뻐”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순간 뒤를 돌아본 아이 엄마의 환한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물론 그녀의 착각을 깨우쳐주지는 않았다.아직 결혼하지 않았지만, 긴 세월 동안 자식을 키워 마침내 엔딩을 보기까지 20여년 매달리는 부모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경쟁사회라도 아이 키우는 일만큼 경쟁심을 자극하는 일은 없다. 엔딩도 엔딩이지만 키우는 과정 내내 쉴새없이 다른 부모들과 경쟁을 벌인다. 어찌 보면 이거야말로 궁극의 보드게임이다. <고고 프린세스>가 아무리 흥미진진해도 현실의 자식농사 경쟁을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