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처지에선 묵묵히 노력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노력할수록, 반짝이는 것을 꿈꿀수록 보잘것없는 처지가 도드라지는 세상이라면, 그렇다면 그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자신을 바꿔 보이겠다며 인생의 목표를 수정한 여자가 있다. “나도 너처럼 남자 잘 잡아서 청담동 들어갈 거야. 천원, 이천원에 벌벌 떨지 않으면서 가족들에게 사람노릇하면서 그렇게 살 거야. 나도 너처럼.” 청담동 디자이너를 꿈꾸던 한세경(문근영)은 그녀와 다른 가치관으로 경멸해왔던 예고 동창 서윤주(소이현)에게 ‘청담동 며느리’가 되는 노하우를 전해 받는다. 그리고 자신을 청담동 부유한 이들이 사는 곳으로 데려다줄 ‘시계토끼’ 타미홍(김지석)을 따라 파티에 참석한다. 세경은 렌털 숍의 명품으로 치장하고 열심히 공부한 매너와 화술로 이목을 끄는 것에 성공하지만, 타미홍이 그녀에게 스폰서를 연결하자 모욕감에 물을 끼얹는다. 그리고 그가 되돌려준 간장을 뒤집어쓴 채 파티장을 빠져나와 눈물을 흘린다. 추위, 초라한 몰골, 모욕감, 자존심, 눈물. SBS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를 보다 문득 오래전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이 떠올랐다.
노래방 도우미 일을 하는 친구에게 빌린 요란한 명품을 걸치고 한겨울에 여름 샌들을 신은 이수정(하지원). 그녀는 발리에서 가이드를 했던 인연을 빌미로 재벌 2세 재민(조인성)의 회사로 찾아가 일자리를 부탁한다. 하지만 그는 수정을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고, 남겨뒀던 연락처를 구겨버리는 것을 엿보게 된 수정은 눈물을 흘린다. 뻔뻔할 정도로 천진한 얼굴을 방패삼아 자존심을 지키던 그녀의 눈물은 단지 일자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도, 새삼스런 수치심으로 설명하기도 부족하다. 재민을 기다리는 동안 콤팩트의 거울을 보며 화장이 괜찮은지 확인하던 수정의 마음 한편에 깃든 기대-부유한 이들과의 인연이 다시 이어지길 바라던 마음이 짐작하던 것보다 훨씬 간절했다는 것을 그녀는 거절당하는 순간 깨달은 게 아닐까. 발리에서 재민 일행을 가이드하며 잠시 엮이기도 하고, 부유한 이들의 세계에 매혹당한 뒤라 그 기대는 더 강렬하고, 처지와 기대 사이의 간극이 클수록 더 참담했으리라. “내 소원이 뭔지 아세요? 처음부터 다 가진, 그런 놈 하나 물어서 팔자 고치는 거예요.” 인욱(소지섭)에게 털어놓은 수정의 고백이다.
그리고 세경도 1년 계약직으로 입사한 의류회사에서 사모님(윤주)의 쇼핑 심부름을 하다가 어마어마한 소비의 세계를 엿보고 휘청거린다. 원래 세경의 가치관으론 부유한 이들의 혼사를 잇는 타미홍의 줄을 타고 청담동 며느리가 되어 쇼핑을 도락 삼는 것이나, 스폰서를 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모욕감에 바르르 떨던 것도 따지고 보면 위선이란 걸, 세경도 안다. 나보다 못했던 너도 했으니 나도 할 수 있을 거라 달려들었고 늘 하던 대로 ‘노력’해서 파티 매너와 화술을 익히고 주목을 끌었지만 그런 식의 노력은 결국, 타미홍에게 스폰서가 필요한 세경의 ‘처지’를 읽힌 셈이다. “검을 테면 철저하게 검어라. 단 한개의 깃털도 남기지 말고.” 윤주의 다이어리에 적힌 시 구절처럼 철저하게 검지도, 희지도 못했던 세경의 눈에 비로소 눈물이 터진다. 세경은 노력하는 행위에 집착하는 것으로 스스로 보상을 얻으며 안쪽의 껍질을 쌓아갔던 것이다. 온전히 서러울 수도 없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내면을 들킨 이들의 참담한 울음은, 깨진 분가루가 지저분하게 내려앉은 수정의 콤팩트나 세경의 흰 스웨터 소매에 달라붙어 있는 보풀들의 남루함처럼 일상의 도처에 있지만 드라마에서 마주할 기회가 드문 것들이다. 사실 남자주인공인 쟝 티엘 샤(박시후)에 관해 한 페이지 가득 써도 모자랄 판국인데, 눈물에 생각이 번잡해지고 말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