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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시리즈 산책] 방송사들, 왜 잘 나가는 외화 천대할까?
2002-01-31

지상파 외화 핍박시대

언제부터인가, <X파일> 이라는 드라마는 우리나라 지상파에서 방영하는 외화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그 누가 시켜준 것도 아니지만 으레 ‘월요일은 X파일 하는 날’이 되었고, 사람들은 재미있는 외화 하면 <X파일> 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2002년. 나는 매우 불안하다. 정말로 <X파일> 은 우리나라의 열악한 외화 사정을 온몸으로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트렌디 드라마의 열풍 이후 점점 외화 시리즈는 11시 심야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이제는 아예 12시 이후로 편성이 되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청률 상위권은 국내 드라마가 장악하고 있다. 이런 현상 때문에 때로 외화는 인기가 하락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렇게 단정을 내릴 수 없다.

한마디로 외화의 인기가 줄어든 것은 애당초 경쟁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광고에 총력을 다하며 프라임타임이라는 저녁 8시부터 11시까지를 장악한다. 그러나 외화 시리즈는 밤 12시나 새벽 1시, 혹은 토요일 낮에 방영되는 것이 보통이며 예고도 없이 종영하는 경우도 다반사인데다, 거의 제대로 시간을 맞춰 방영을 한 적도 없다. 그런데 비교가 가능이나 할까?

SBS의 <프로파일러>는 첫 방송을 25분을 어떠한 사전고지 없이 늦춰 방영을 시작했으며, 그 이후도 큰 차이점이 없었다. <X파일> 은 1월18일부터 또다시 12시25분으로 늦춰졌다. 새벽 0시가 편성시간이라고 KBS 편성정책부에서는 주장을 하지만, 주간편성부에서는 분명히 편성정책부에서 0시25분으로 내려보냈다고 주장을 한다.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짜고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거의 1년에 가깝게 시청자들이 시간을 당겨 달라고 주장을 한 드라마를 한달 만에 도로 30분 가까이 밀어내는 것을 결정하는데, 그 저항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 모든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모두들 ‘외화는 인기가 없다’라고 미리 규정을 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맞춰놓기 때문이다.

TNS미디어코리아의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 지상파 밤 12시대의 프로그램 중 시청률 10% 이상을 기록하며 주간시청률 20위권에 드는 프로그램은 단 한편 이외에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X파일> 은 시청률이 낮다는 평가를 들으며 가장 황금요일인 금요일에 넣은 것을 감사하라는 말까지 들어야 한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 교육계가 1등만 선호하고 2등 이하는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것이 본래 한국인의 습성인가보다, 라고 의심까지 하게 된다. 이것 역시 설명 가능하다. ‘외화는 인기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밤 12시가 넘어 시작하는 프로그램이 10%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은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레짐작하기 때문이다. MBC에서 방영하는 <과학수사대 CSI> 역시 사정은 다른 곳과 다르지 않다. 아무런 이유없이 일요일 낮에서 토요일 낮으로 이사갔다. 수사물에 호기심 많을 학생들과 젊은 직장인에게 보지 말라는 뜻과 동일하다. 심지어 MBC는 그 밥에 그 나물 성우팀 편성으로 다른 외화에까지 ‘더빙하니 원판을 망친다’라는 욕까지 먹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는 아니다. 이 첫 방송되던 94년의 10시50분이라는 시간은 지금의 11시50분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 11시가 황금시간대로 떠오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94년부터 2002년까지 8년 넘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재미있는 드라마’라는 인식을 꾸준히 확고하게 지닌 드라마는 흔치 않다는 것을 지상파 방송사들은 인정하지 않으며, 특히나 외화는 양질의 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양질의 드라마가 탄생하려면 양질의 편성이 함께 만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외화 시리즈에만은 거부한다. MBC는 <버피와 뱀파이어>를 새벽1시에 편성함으로써 에 못지않을 마니아층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렸고, SBS는 <ER> 시즌 3을 포기함으로써 이미지 쇄신 기회를 버렸고, KBS는 이 두 방송사의 전철을 그대로 밟으려 하고 있다.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의 손자이며 공동저자인 손빈의 이야기. 전차경주 내기를 좋아하는 영주가 번번이 내기에 실패하자, 손빈이 이를 분석해서(투자 애널라이즈?) 알려줬다. 1등 마차와 1등 마차를 붙이지 말고, 1등 마차에는 3등을, 2등에는 1등을, 3등엔 2등을 붙여 경쟁을 시켜라. 그렇게 되면 절대 손해보지 않고 이득을 취할 수 있다. 괜히 <손자병법>이 ‘병법’(兵法)이 아닌 것이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질을 안 가리고 시청률에 목매기로 결정했다면, 좀더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질을 안 가린다는 말은 무식해지란 말이 아니라 정말 영악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남명희 I 자유기고가 zoo@zootv.pe.kr

▒사진 설명 ... 1.<X파일> 2.<버피와 뱀파이어> 3. <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