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첫 직장은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이었다. 보도연맹, 인혁당 사건 등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그늘을 하나하나 들춰낸 이 프로그램의 취재가 이루어지던 지난한 시간들을, 당시 막내작가였던 나는 가끔 떠올린다. 옆자리 작가 언니는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과 관련된 의혹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30년 전 조선호텔 근무자와 운전사 등 이름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이들의 연락처를 추적했고, 또 다른 언니는 80년대 운동권 학생 조직에서 별명으로만 불리던 누군가를 찾아내려 애썼으며, 과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라 명명되었던 사건을 맡은 나는 육사 졸업생 연락망을 샅샅이 뒤져 조금이라도 입을 열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옛 장성들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제주 4.3 희생자 가족, 삼청교육대 피해자, 늙고 병든 북파 공작원 등 취재원 대부분은 가난하고 불행했으며 ‘과거사’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그들의 고통은 현재형이었지만 방송은 오래된 상처를 헤집을 뿐 보상도 치유도 해줄 수 없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국가와 공권력에 의해 삶을 짓밟혔는데도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가난과 고통의 대물림이라는 현실은 마주할수록 절망적이었다. 이듬해 100회를 채우고 막을 내린 그 프로그램의 이름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였다.
방송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결국 답을 얻지 못하고 일찌감치 방송 일을 그만두었던 시절의 나는 알지 못했다.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일인지.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실을 가장 절실히 깨달은 것은 지난 몇년간 방송이 ‘말’할 수 없도록 훼손될 때마다였다. YTN <돌발영상>, EBS <지식채널e>, MBC <PD수첩> 등 방송사 간판 프로그램의 제작진이 해직과 징계와 부서 이동으로 끌려나가 돌아오지 못했고 대통령 선거를 앞둔 올해의 지상파 뉴스는 누더기에 가까웠다. 친일 행적이 뚜렷한 인물의 다큐멘터리는 ‘미화’ 논란에도 불구하고 방영되었지만 정치 현안을 다루는 시사 프로그램은 방송 불가와 검열로 진통을 앓았다. 팟캐스트 딴지 라디오의 <나는 꼼수다>와 <뉴스타파> 등 ‘장외’ 미디어들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주류’ 언론의 철저한 차단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독재자의 딸’이라는 생물학적 정체성을 떠나 독재 정권으로부터 재물과 정치의식을 그대로 물려받은 동시에 과거사에 대한 사과마저 ‘민혁당 해프닝’으로 끝내버렸음에도 공고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자리는 그 벽 안쪽에 있었다.
“이슈가 없다, 모두 겁에 질려 있다”, 대선 막바지 정국을 바라보는 노정객의 인터뷰 제목이 오래오래 맴돈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말하는 자 모두 쫓겨나거나 잡혀간 자리에 드리워진 것은 ‘네거티브’가 아닌 정당한 비판과 문제제기조차 이루어질 수 없게 하는 두려움의 장막이었다. 트위터가, 게시판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방송은 고요했다. TV토론이 시작되었지만 야권 단일화는 눈에 띄는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고 박 후보는 ‘단독’ 토론이라는 해프닝을 남겼을 뿐이었다.
무기력하게 흘러가던 공기를 바꿔놓은 것은 지난 12월4일, 초청 후보 3인의 첫 TV토론에 참석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였다. ‘침묵의 형벌’을 마치고 돌아온 지 3개월 만에 모처럼 큰 무대에 설 기회를 얻은 그는 박 후보가 강조해온 ‘신뢰’와 ‘약속’의 허점을 조목조목 파고들었고 측근 비리, 정수장학회 장물 논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받았던 6억원의 출처 등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을 언급하며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을 입 밖에 낸 순간은 일종의 신호탄과 같았다. ‘장외’에서가 아니면 감히 입 밖에 낼 수조차 없었던 이슈와 팩트에 대해 쫄지 않고 말해도 된다는, 말할 수 있다는. 그래서 토론의 흥행이 표심의 향방을 바꿔놓지는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랜만에 느낀 카타르시스는 실로 강렬했다. 어쩌면 짧은 ‘선빵의 추억’으로 남을지라도, 말하고자 하는 그대로를 세상에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이토록 신나는 일이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그 쾌감을, 이정희가 일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