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들판을 걷던 네명의 사내가 갑자기 불어온 한줄기 돌풍에 고개를 숙이고, 그중 한 사내가 들고 있던 서류철에서 문서들이 바람에 날려 하늘로 흩어져 오른다. 제프 월의 <갑작스런 바람>(1993)은 언뜻 보기에는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하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것처럼 보이나, 실은 배우들을 데려다 연출하여 찍은 사진들을 포토숍으로 합성한 것이다. 원작은 일본의 판화가 호쿠사이의 작품으로, 작가는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일본의 목판화를 사진적 수단으로 재연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제프 월, 카메라를 든 화가
흥미로운 것은 한갓 ‘상상의 산물’인 회화가 ‘현실의 기록’인 사진의 외양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점이다. 사실 제프 월은 오래전부터 작품에 명작 회화의 구성을 차용한 바 있다. 가령 <파괴된 방>(1979)은 들라크루아의 <사르디나팔의 죽음>(1872)을, <여성들을 위한 그림>(1979)은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1882)을, 그리고 <이야기꾼>(1991)은 역시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1863)를 시각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매체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반(反)모더니즘적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제프 월은 보들레르를 인용하여 “현대생활의 화가”를 자처한다. 카메라로 작업을 하면서도 자신을 ‘화가’로 여기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픽처링’(picturing)이라 부른다. ‘픽처’(picture)라는 말은 ‘그림’과 ‘사진’을 모두 의미한다. 이 중의성을 활용하여 자신이 하는 작업의 요체가 회화와 사진을 가로지르는 데에 있음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렇게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향은 80년대의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가령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제 작업을 ‘사진회화’(photopainting)라 불렀다.
제프 월은 카메라로 현대의 일상을 그린다. 가령 <흉내내기>(1982)를 보자. 한 백인 남자가 여성 파트너와 길을 가다가 마침 옆을 지나는 아시아 남자를 보고는 아시아인종의 째진 눈을 흉내낸다. 언뜻 보기에는 순간을 포착한 보도사진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역시 배우들을 데려다 연출해서 찍은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허구라고 할 수도 없다. 그 장면은 작가가 언젠가 실제로 봤던 것을 재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스트레이트 포토로 찍을 수는 없는 일. 그것은 연출을 통해 회화처럼 그려져야 한다.
보수가 진보로, 회화적 사진의 역설적 반향
‘사진은 회화처럼.’ 70년대 말에 네오-픽토리얼리즘이 등장한 데에는 배경이 있다. 그즈음 형상이 빈곤한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이 생명력을 다하고 신표현주의(독일), 트랜스 아방가르드(이탈리아), 신구상(프랑스), 뉴 이미지 페인팅(미국) 등 대형 포맷과 강렬한 색채의 새로운 구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당시의 사진작가들은 개념미술의 영향으로 대개 조그만 포맷의 흑백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회화에서 일어난 변화를 보며 사진 역시 강렬한 색채를 가진 대형 포맷의 이미지로 변신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네오-픽토리얼리즘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때마침 사진을 거의 벽을 덮을 정도의 대형 포맷으로 출력하는 기술이 개발됐다. 같은 시기에 사진을 투명한 매체에 인화하는 기술도 등장했다. 이 두 기술은 당연히 광고에 먼저 사용됐다. 제프 월은 유럽을 여행하다가 거리에서 우연히 라이트 박스 광고탑을 보고, 그것을 아예 자신의 사진을 전시하는 플랫폼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제 사진은 더이상 책에 인쇄된 ‘복제’로 ‘해독’되지 않고, 타블로처럼 갤러리에 전시되는 ‘원작’으로 ‘감상’된다.
제프 월과 더불어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스트루트 등이 회화적 사진의 확장에 기여했다. 이들의 작품은 작품 같아 보이지 않는 작품에 지쳐 있던 시장의 컬렉터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연출하고 가공하는 작가의 장인성, 그렇게 완성된 작품의 유일성, 복잡한 이론 없이 바로 이해되는 가독성. 이 수용의 맥락은 분명히 보수적이다. 아니, 그 이전에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가 과거의 픽토리얼리즘으로 회귀하는 것 자체가 보수적이다. 보수적인 것이 외려 새로움으로 나타나는 것. 이것이 포스트모던의 역설이다.
디지털로 완성한 균열 없는 몽타주의 재림
카메라의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짧은 순간에 인간은 완벽하게 무력하다. 적어도 촬영의 순간에는 조작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촬영 이전에는 상황을 연출할 수 있고, 셔터가 닫힌 뒤에는 사진을 가공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은 특히 조작의 두 번째 단계, 즉 포스트 프로덕션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초기에 제프 월은 회화적 효과를 얻는 데에 주로 상황의 연출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미지를 디지털로 조작하는 게 가능해진 90년대 이후에는 그의 작업에서 포스트 프로덕션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다.
그의 대표작 <죽은 병사들의 대화>(1992)에는 부제가 붙어 있다. ‘매복공격을 당한 뒤의 소련군 정찰병들의 습격. 아프가니스탄 모코르 근처. 1986년.’ 언뜻 보기에는 실제 일어난 사건의 기록처럼 보이나, 저 장면은 기록된 적이 없는 허구의 사건이다. 굳이 저 사건의 원형을 찾자면, 차라리 미술사로, 가령 들라크루아의 <메두사호의 뗏목>(1819)으로 돌아가야 할 거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한명씩 스튜디오에서 따로 촬영한 뒤, 그 형상들을 디지털 기술로 합성하여 야외의 공간에 옮겨놓았다.
허구의 상황을 거의 “영화적”(cinematographic)으로 재연한 이 작품은 디지털 합성의 극한을 보여준다. 원래 저 사진은 개개의 사진들로 이루어진 ‘몽타주’다. 하지만 봉합된 개개의 사진들 사이에 균열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기계의 조립에서 유래한 ‘몽타주’라는 무기적 개념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제프 월의 몽타주는 외려 모더니스트들이 몽타주로서 공격하려 했던 낡은 미적 이상, 즉 ‘유기적 전체성’의 이념으로 되돌아가는 듯하다. 실제로 그의 작품이 지향하는 것은 19세기의 대형 타블로로 보인다.
몽타주 vs 몽타주
모더니즘의 몽타주는 ‘균열’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때문에 그는 종종 모더니스트 비평가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이에 대해 제프 월은 ‘콜라주와 몽타주라는 파편의 아방가르드 미학이 거의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반박한다. 한때 해방적 기능을 했던 몽타주의 미학이 새로운 도그마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비판의 수사학은 회화의 바깥에 어떤 타자를 만들어야 했고, 이런 진리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게 됐으며, 결국 아도르노가 ‘동일성’이라 부른 것으로 변질돼버렸다. 나는 그 동일성에 맞서 싸우는 중이다.”
베냐민은 현대사회는 더이상 외관의 재현으로는 본질이 드러나지 않기에 몽타주로 해부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언뜻 보기에 제프 월은 외관의 재현에 머무는 듯하다. 하지만 몽타주가 진리를 말하기 위해 굳이 불연속이어야 하는가? 그의 연속적 몽타주는 허위를 진리로, 허구를 현실로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이 연출된 상황임을 모르는 관객은 없다. 아니, 외려 그게 연출된 상황임을 아는 것이 그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전제가 된다. 연속적 몽타주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
그의 사진의 의미작용은 첫눈에 보이는 것 그 너머에 있다. 영화적으로 연출된 상황이 때로는 ‘상황’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특유의 아이러니로 제프 월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일상의 상황을 다시 보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