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톤스의 신보 ≪Open Run≫의 재킷을 한참 들여다본 뒤에야 그 이미지가 비행운이라는 걸 알았다. 컴퓨터그래픽인지 실제 사진과 배경을 합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둠 속의 비행운을 한참 동안 보고 있자니 현실에서 그런 장면을 보고 싶었다. (불가능하겠지만) 완벽한 어둠 속에 누워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하얀 비행운을 한번쯤 보고 싶었다. 앨범 속 노래처럼 <검은 우주>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겠지. 마음에 꼭 드는 앨범 재킷이다. 소설가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의 표지였어도 무척 좋았겠다.
예전에는 (돈이 무척 많았는지) 앨범 재킷만 보고 CD를 고른 적도 많았다. 재킷의 이미지와 폰트를 선택하는 감각만 봐도 어떤 종류의 음악을 하고 얼마나 음악을 잘하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자주 성공했지만 가끔 실패한 CD들이 지금 음반장 한구석에 방치돼 있다. 요즘은 그러지 않는다. 그렇게 무모하지 않다.
무모하던 시절에 페퍼톤스의 ≪Open Run≫앨범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페퍼톤스를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어떤 음악을 상상했을까. ≪Open Run≫의 앨범 재킷을 보자마자 마그네틱 필즈의 ≪The Charm of the Highway Strip≫(검은 바탕 한가운데 노란 차선만 그려진 디자인이다)을 떠올렸는데, 마그네틱 필즈처럼 묵직하게 질주하는 음악, 어둡지만 리드미컬한 음악을 상상했을 것 같다. 어쨌거나 두 앨범 모두 훌륭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한쪽은 노란색 차선만으로 한밤의 고속도로를 떠올리게 했고, 한쪽은 하얀 비행운으로 검은 우주를 상상하게 했다.
음반의 경우엔 어떤지 모르겠지만 책을 만들 때는 모든 작업이 다 끝난 뒤에 마지막으로 표지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쓴 이야기들로 이뤄진 글자들을 빨래 개듯 차곡차곡 쌓아놓고, 작가의 말도 모두 끝낸 다음, 표지를 고른다. 여러 개의 표지 시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마음이 콩닥콩닥 뛴다. 아,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책을 살까, 50만명? 70만명? 아니 이번 소설은 무척 좋으니 100만명? 아니, 꿈 깨.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꿈을 꾸는데, 표지란 서점에 깔릴 내 소설을 더 잘 보이게 해서 더 많이 팔려고 만드는 게 아니라 누군지 모를 당신들,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을 당신들, 차곡차곡 접어놓은 글자들을 풀어헤칠 당신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봉투를 만드는 것이어서, 더 정다웠으면 좋겠고 더 반가웠으면 좋겠다는 꿈을 꾼다. 상업적인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적당한 타협점이 생기지만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는 듯한 심정은 그대로 남아 있다. 봉투를 열어서 꺼낸 편지지에 빼곡하게 적힌 사연들처럼 내 소설들도 그렇게 궁금한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페퍼톤스가 내게 보낸 편지에서 <검은 우주>를 꺼내 듣고 있다. 음반 재킷과 무척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전에 들었던 페퍼톤스의 음악 같아서 정답고, 내가 알던 페퍼톤스와 전혀 다른 우주 같기도 해서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