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포맷, 예리한 윤곽, 강렬한 색채로 현실보다 더 강력한 현실을 제시하는 구르스키의 사진은 우리를 당혹시킨다. 너무나 사실적(=사진적)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허구적(=회화적)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도 엇갈린다. “이것은 진짜 세계다. 내 모든 사진에서 이 점이 내게 중요하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결국 우리는 그림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게 뭘 보여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요점은 그것이 그림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구르스키의 말은 모순되는 게 아니다. 돌이켜보건대 사진은 등장 초기부터 ‘예술이냐, 기술이냐’의 정체성 혼란에 빠져 있었다. 사진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이 새로운 이미지를 자신들에게 익숙한 매체, 즉 회화의 문법으로 파악하려 했다. 그 결과 초창기 사진은 고전회화를 모방하여 인위적으로 세팅된 배경에서 모델이 연출하는 약속된 포즈를 담곤 했다. 이를 ‘픽토리얼리즘’(pictorealism)이라 부른다.
하지만 사진은 곧 자신의 매체성을 의식하게 된다. 휴대용 사진기가 보급되면서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 장면을 찍는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straight photography)가 확산된다. 이 기록사진들은 곧 신문, 잡지와 결합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다. 하지만 사진 이미지를 둘러싼 정치사회적 논란 속에서 사진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소박한 인식도 깨진다. 사진은 해독되어야 할 텍스트라는 얘기다.
픽토리얼리즘이 사진을 ‘도상’(icon)으로 여겼다면,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의 시대는 사진을 ‘상징’(symbol)으로 여겼다. 그의 유명한 저서(<밝은 방>, 1980)에서 롤랑 바르트는 여기에 새로운 이론을 첨가한다. 사진의 본질은 ‘그때 거기에 피사체가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진의 기호학적 특성을 ‘지표’(index)로 본 셈이다. 바르트에게 사진이란 ‘코드 없는 메시지’, 즉 그 어떤 해독에 앞서 존재했던 어떤 것의 흔적이다.
당혹스러운 것은 바르트의 이론이 하필 사진에서 지표성이 사라질 즈음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디지털 사진은 ‘그때 거기에 있었던 것’의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거기에 없었던 사물을 슬쩍 가져다놓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존재하는 양 제시할 수가 있다. 이로써 사진은 기록적 성격을 잃는다. 게다가 사진에 메시지를 담는 것도 이미 철 지난 유행이다. 그렇다면 다시 회화로 돌아갈 수밖에 없잖은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구르스키는 사진에 디지털 조작을 가한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는 시점은 건물 전체의 정중앙에 해당하는 지점. 여기선 건물 전체가 왜곡 없이 화면 안에 들어온다. 그 위치에서 건물을 육안으로 볼 경우 중심은 선명하고 주변은 흐릿해 보일 터이나, 그의 사진에서는 모든 지점이 선명하다. 윤곽은 물론 색채까지도 육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뚜렷하다. 이 때문에 사실적인 사진이 동시에 허구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포스트 프로덕션 덕분이다. 사실 이는 르네상스 화가들의 방식이기도 하다. 모델을 멀리 떼놓고 그 상태에서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인상을 그린 바로크 화가들과 달리 르네상스의 장인들은 모델에 다가가 세밀히 관찰하여 옷의 세세한 무늬까지 정교하게 그려넣었다. 바로크 회화는 주관적 인상이라 가까이서 보면 윤곽이 흐릿하나, 르네상스 회화는 객관적 재현이라 모든 디테일이 선명하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수없이 모델에 다가가 관찰한 것들을 합쳐 일종의 ‘시각적 종합’을 창조했다. 구르스키는 디지털 기술로 그와 똑같은 일을 한다. 그의 사진에서 윤곽은 육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선명하며, 색채는 육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강렬하다. 이로써 현실보다 더 강력한 새로운 현실이 탄생한다. 이 증강현실(?)은 새로운 리얼리즘일까? 아니면 새로운 픽션일까? 어느 쪽으로도 대답하기 어렵다.
연속과 불연속
사진에서 초점을 맞춘 부분은 선명하고 주변은 흐려지게 마련이다. 모든 디테일을 선명하게 찍으려면 피사체의 각 부분과 렌즈의 거리에 따라 초점을 매번 바꿔 찍은 뒤 합성하는 수밖에 없다. 이는 세잔의 화법을 닮았다. 세잔은 정물을 그릴 때 매번 시점을 바꾸어 그렸다. 그것들을 하나의 화면 안에 통합하면 초점들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그 균열을 세잔은 테이블보와 같은 것을 이용해 애써 감추려 했다.
세잔이 시점들 사이의 불연속을 애써 감추려 했다면, 큐비즘은 그것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가령 피카소의 화면에서 다양한 시점의 파편들은 균열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의 미학이다. 베냐민은 이 큐비즘 기법 자체가 움직이는 시각, 즉 카메라의 효과임을 지적한 바 있다. 연속성을 가진 연극과 비교할 때, 영화의 이미지 역시 불연속적인 숏들의 연쇄, 즉 몽타주라 할 수 있다.
구르스키의 사진 역시 모종의 ‘몽타주’다. 하지만 그의 것은 불연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각각의 시점은 하나의 화면 안에서 봉합선 없이 이어진다. 세잔의 경우 불연속을 감추려 해도 균열이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온다. 가령 카무플라주(위장)를 위해 슬쩍 덮은 테이블보 양쪽으로 보이는 테이블의 두선은 직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반면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구르스키로 하여금 시점들 사이의 균열을 완벽히 봉합할 수 있게 해준다.
모더니즘은 자신의 매체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가령 30년대의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는 연속을 그대로 드러냈다. 하지만 구르스키의 몽타주는 불연속을 연속으로 가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모더니즘의 몽타주와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디지털 기술 자체에 내재한 포스트모던한 특성이랄까? 세잔의 정물에서 ‘화가의 눈’을 보고, 포토몽타주에서 ‘카메라의 눈’을 본다면, 구르스키의 사진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바로 ‘컴퓨터의 눈’이다.
구상과 추상
비평가들은 가끔 이를 비판하곤 하나, 그 비난은 과녁을 완벽히 빗나간 것이다. 불연속은 카메라의 특성이지 컴퓨터의 특성은 아니다. 불연속을 완벽하게 봉합할 수 있는 게 디지털 매체의 특성이다. 따라서 ‘어느 매체든 자신의 매체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게 모더니즘 비평의 원리라면, 디지털 사진을 그 매체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구르스키야말로 외려 모더니스트들보다 모더니즘의 원리에 더 충실한 게 아닐까? 묘한 역설이다.
구르스키는 낡은 공장들을 시리즈로 담은 ‘유형학적 사진’으로 유명한 베혀 부부에게 사사했다. 베혀 부부의 사진은 신즉물주의의 전통을 반영하여 어딘지 냉담한 ‘데드팬’의 분위기를 풍긴다. 구르스키는 모듈에 가까울 정도로 획일적으로 반복되는 모티브들을 시리즈가 아니라 한 화면에 동시에 담아낸다. 그 때문에 그의 사진은 어딘지 추상회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거기서 개개의 피사체는 그저 회화적 구성 속의 조형적 요소들처럼 보인다.
구르스키의 사진은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적 ‘숭고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데드팬의 그 냉담한 분위기 속에 체제에 대한 비판의 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미술평론가 할 포스터는 신즉물주의 사진처럼 구르스키의 작품 역시 무턱대고 현실을 유미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 모든 위기에도 불구하고 상승하는 자본주의 자체에 어떤 숭고함이 존재한다. 베냐민이 말한 신(新)천사의 눈앞에 펼쳐진다는 그 거대한 파국의 드라마의 숭고함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