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와 함께 본 영화는 정말 너무 환상적이었다. 그 영화를 생각하니 그와 함께했던 즐거웠던 일들이 추억이 되어 밀려든다. 뭐 이런 얘기를 나도 가끔은 하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화와 관련해 내겐 특별히 그런 기억이 없는 것 같다. 남자와 영화를 본 적이 없느냐고? 물론 그건 아니다. 여러 번 남자와 영화를 본 적 있다. 그렇다면 좋은 영화를 본 적이 없는가? 그건 결단코 아니다. 세상엔 너무나 좋은 영화가 많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둘, 좋은 영화와 즐거웠던 연애를 연결시키기가 어려운 것이다. 좋은 영화를 본 기억은 많지만 대부분 혼자서 본 영화이거나 친한 여자친구와 본 영화가 대부분인 거 같다. 좋은 영화에 좋은 남자에, 너무 많은 걸 바랄 수는 없나 보다. 세상엔 그런 지나친 행복의 순간은 문득 떠오를 만큼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닌 거 같다.
나만의 좋은 연애 사연이 담겨 있는 영화를 기억해내는 것을 포기하고서, 오늘 내가 얘기하고 싶은 영화는 <전망 좋은 방>이다. 처음 본 뒤로 마음이 울적하거나 왠지 외로운 기분이 들거나 하면 가끔 이 영화의 비디오테이프를 꺼내어 보곤 했다. 이 영화에는 마음을 무겁게 하는 요소가 단 하나도 없다. 나는 그런 게 좋다. 보는 사람을 무겁게 만들지 않고 달콤한 맛을 음미하고 싶게 만드는, 마치 사과파이를 먹는 것 같은…(생각해보니 다음엔 사과파이와 함께 봐도 좋을 듯하다). 너무 달콤하게만 이루어진 것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친구들이 종종 있는데 그들이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달콤한 것이 나는 좋다.
영화에서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키스’이다. 햇빛이 반짝거리는(그들이 키스를 나눈 뒤에는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린다),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어떤 비탈길, 양귀비꽃과 황금색보리가 너울거리는 바로 그곳에서 그들, 그러니까 루시와 조지의 첫 키스가 이루어진다. 이 장면은 나중에 여주인공 루시의 회상신에서 다시 한번 보여짐으로써 강조된다. 그리고 그들의 두 번째 키스신은 루시네 영국집 마당 울타리 옆 계단에서이다. 그녀의 약혼자인 세실이 읽게 되는 소설책 <로지아 아래에서>가 알고 보니 플로렌스에서의 그들의 첫 키스신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루시와 조지. 당황해서 달려가는 루시를 조지가 쫓아가고, 뒤이어 달려오는 약혼자인 세실을 인식하면서 하게 되는 숨막히는 순간의 키스이다. 스릴 넘치는 순간의 키스는 정말 짜릿할 것만 같다. 그리고 영화는 당연히 해피엔딩이고 다시 그들이 처음 만났던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전망 좋은 여관 방에서의 행복한 키스로 끝이 난다.
이 영화에는 좋아하는 대사가 무척 많이 등장하는데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예를 들면 “아빠, 우리가 로마에서 본 게 뭐죠?” “아마 우리가 누런 개를 본 게 로마일걸” “내 경험에 의하면 이탈리아의 풍경에 둔감한 여자라고 해서 연애 기질이 없는 건 아니에요” “내가 맞혀볼까요? 거기서 멋진 연애를 한 거죠? 부인할 생각은 말아요” 등등이다. 대사들은 가볍고 풍경들은 풍성하다. 사실 영화 속 사랑을 실제로 꿈꾸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언젠가 한번쯤은 그런 감정을 꿈꾸거나 혹은 실제로 경험해봤거나 했을 법은 하다. 물론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고전적 풍경 속이 아닐 확률이 높지만.
모든 로맨스를 다루는 영화나 소설에서 여자가 주인공이거나 초점이 되는 것이 정통이라고 한다. 그건 왜일까? 아무래도 여자들이 남자들에 비해 로맨스를 좋아해서일까? 아무튼 나도 여자인지라 행복해지는 로맨스를 지켜보는 것을 즐기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더군다나 예쁜 메모지를 모으던 소녀 시절 첫사랑의 감정을 깨워줄 것만 같은 영화라면 더욱더 말이다. 과연 현실에서 내가 이 영화를 함께 봐서 더불어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남자가 있을까. 솔직히 이런 소녀적 감성을 남자와 공유하면 왠지 다른 색깔로 바뀌어버릴 것만 같다. 서로 공유하지 못하더라도 서로 각자 꿈꾸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젠 농담으로라도 소녀라고 불릴 수 있는 처지에서 한참을 밀려나와 있기에 정말이지 그리워해야만 하는 그런 어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