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타이에 와 있다. 몇몇 도시를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면서 자연스럽게 같은 업에 종사하는 타이 건축가들을 만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그동안 검열로 인해 선전영화나 멜로물밖에 만들지 못했던 라오스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스릴러영화가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 성공을 배경으로 또 다른 영화가 제작될 예정이라는 소식도 곁들여서. 영화의 제목은 <지평선에서>이다. 감독의 이름은 에니세이 케올라. 라오스 태생이고 호주와 타이에서 공부했다. 국제영화계에서의 지명도는 잘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한 나라의 영화산업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는 점에서는 의미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처음에는 다 이렇게 시작하지 않을까.
이전에 라오스의 루앙 프라방을 다녀온 이후 라오스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관심이 생겨서 자료를 찾아보았을 때만 해도 어떤 타이 감독이 만든 멜로물(<Sabaidee Luang Prabang>, 2008)밖에 없었다. 음악쪽은 어떤가 하고 찾아보니 미국의 포크 가수 데이브 반 롱크가 만든 <루앙 프라방>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이 연재물을 쓰고 있는 취지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좋은 장소라도 문화예술 창작물의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획득하기가 어렵다. 우디 앨런이 만든 일련의 영화들이 없는 뉴욕, 고갱이 그림을 남기지 않은 타히티, 노래로 불리지 않은 로렐라이 언덕 같은 것들을 상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우연히 보게 된 한 잡지에 의하면 이 젊은 라오스 감독의 수완이 보통이 아니다. 우선 검열관을 찾아간 뒤 스릴러를 만들려고 하는데 어차피 허락 안 해줄 거니까 찍기는 100% 라오스에서 찍되, 상영은 나라 밖에서만 하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겨우 허락을 받은 뒤 장비는 빌리고 배우와 제작진은 다른 직업이 있는 아마추어들로 충원하여 촬영을 마쳤다. 그 이후의 사건 전개가 흥미로운데, 그는 다시 검열관을 찾아가 영화를 다 만들었으니 한번 보라고 권했다. 그런데 다 보고난 검열관이 좋아하면서 허락을 해줘서 상당 부분 편집을 다시 하고 자극적인 장면은 일부 모자이크 처리를 하는 조건으로 결국 상영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영화는 일종의 납치물인데 부와 권력에 대한 비판과 사회정의에 대한 생각이 강하게 깔려 있는 점이 흥미롭다. 12월 초 루앙 프라방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luangprabangfilmfestival.org)에도 출품했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이전에 남들이 못했던 일들을 하려고 애쓰고 있을 것이다. 작고 보잘것없었던 움직임이 어느 순간 커다란 힘이 되어 세상을 움직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 과정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만큼 힘이 되는 것은 없다. 따지고 보면 문화예술 분야에서 최고의 행위는 스스로 발견되는 것을 넘어서 남을 발견해주는 것이다. 이건 우리의 이야기일 수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