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앞둔 동료에게서 ‘스드메’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머릿속에 어딘가 이국적인 풍광이 펼쳐졌다. 야자수 아래 피리로 뱀을 부리는 남자가 있고 베일을 쓴 여인이 은쟁반에 남자의 목을… 아차, 이건 살로메. 알고 보니 ‘스드메’는 스튜디오 촬영과 웨딩드레스, 메이크업 패키지를 이르는 말이었다. 남자는 있으나 결혼은 아직 하지 않은 서른 중반. 혼인은 ‘인륜지대사’라는 어른들 말씀도 어디 법력 높은 스님 이름인가보다 하고 흘려듣고 나 좋을 대로 살다가 마흔 무렵엔 친구들 모아놓고 먹고 마시는 조촐한 파티로 결혼식을 대신하는 것을 꿈꾼다. 퍽이나 진보적인 결혼관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십년 전쯤 당시 남자친구의 어머니에게 ‘건강진단서를 떼어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 부모도 모르던 효심과 모욕감이 폭발하더라. 남자가 좋으면 부모는 관계없을 줄 알았던 자신에 대한 평가는 그때 갱신했다. ‘가풍에 따른 상식의 기준선이 충돌하는 결혼은 죽어도 못하겠구나’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가 흰 드레스 판타지를 우회해 다른 판타지를 불러온 셈이다. 부모를 제외한 결혼.
결혼을 130일 앞두고 드디어 부모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 스물여덟 동갑내기 커플이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좇는 JTBC 드라마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는 말이 감정을 부르고 감정이 말을 낳는 연쇄반응을 양가 어머니들에게로 확장한다. 그저 가치관이 다른 집안간의 신경전이라면 다른 드라마에도 흔히 볼 수 있지만, 부모의 경제력이 출발선이 되는 기묘한 독립-결혼에 대한 현실인식을 공통점으로 이들의 부모들은 발언권을 얻는다. 사돈네 등기부등본까지 떼보고 결혼을 허락했던 혜윤(정소민)의 엄마 들자(이미숙)는 정훈(성준)네가 재산을 사회 환원한다는 소식에 마음이 초조하다. “자네 월급으로 어느 세월에 집을 장만하나. 혜윤이 연봉보다도 못 받잖아. 살면서 부모한테 손 벌리기가 쉬운 줄 아나. 이럴 때 기회가 좀 좋아? 공식적으로 부모에게 결혼이란 이름으로 독립하면서 한몫 떼달라 하면 좋잖아. 강남의 아파트는 국 끓여 드실 건가? 그거 달라 해!” 정훈의 어머니 은경(선우은숙)은 남편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독립이라는 게 돈이 있어야 하는 건데 정훈이 걔 돈 없어요. 결국 우리 지갑에서 나가게 된단 말이에요. 내 지갑에서 돈이 나가는데 군말없이 뒤로 빠져 있기 쉽지 않아요.” 부족함 없이 커서 집안의 재산 상황에 관심이 없는 정훈이나 알뜰하고 손이 야무지며 야망보다 평범하고 따뜻한 남자를 선택한 혜윤은 ‘결혼은 두 사람의 독립이니 서로의 뜻대로 하게 도와달라’고 선언하나 둘이 합쳐 400만원인 월급의 70%를 저축해 3년에 1억원 만들 궁리를 하고 있다. “120으로 생활이 가능해?” “빚 없으면 가능해. 집 안 해주신대?”
이들의 출발선과 그것을 공표할 식장을 조율하는 두 예비 사돈의 심리전은 스릴러가 따로 없다. ‘창신동 30평 아파트’로 만족 못하는 들자가 ‘재산도 많아 보이는데 자식에게 더 쓰지 않느냐’ 자존심을 긁으면 돈 이야기를 천박하게 생각하던 은경은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겠다는 식으로 응수해 1억원대의 예단 목록을 작성한다. 월세도 안 나오는 화장품 가게에서 샘플만 얻어가는 얌체손님이나 외상손님을 상대하는, 일상에선 실속없는 들자가 생각하는 결혼의 시세. 그리고 부유하게 생활해 금전 개념이 없는 은경이 생각하는 품위의 기준이 허황되긴 하나 이들의 신경전이 잦아든다고 해서 자식들만의 결혼이 완성되는 해피엔딩이 찾아올 것 같지는 않다. 출발선이 어디가 되는가가 달라지겠지. 내가 품었던 간소한 결혼 판타지도 실은 정신승리 아닌가 싶다. 출발선에 서는 것을 유예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동지도 늘어나는 추세니, 모여서 남의 결혼식 뷔페나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