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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의 아주 사적인 클래식] 주목해야 할 아방가르드 시네아스트

<갤리밴트> Gallivant, 앤드루 쾨팅, 1996년

<갤리밴트>

<갤리밴트>

식당에 들어서자 두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어머니가 생각나 옆 테이블에 앉아 힐끔힐끔 곁눈질을 했다. 아이처럼 맑은 얼굴의 할머니는 맞은편 사람이 시누이라고 했다. 시누이가 혼자 사는 할머니를 방문한 거라고 추측했는데 착각이었다. 두 할머니가 식당에서 식사를 나눌 동안, 할아버지가 집을 본다고 했다. 이제 집에 있는 걸 더 편하게 여긴다는 할아버지가 재미있다는 듯이 두 할머니는 연신 웃었다. 17살에 결혼한 할머니는 89살, 집에 있는 할아버지는 92살이란다. 72년 세월을 해로했다는 말에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한번씩 감탄사가 오갔다. 72년. 무엇이 두 사람의 인연을 긴 시간 내내 묶어준 것일까. 이런저런 상상을 해봤으나 세월의 무게를 감당할 만한 비결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군가와 햇수로 열 손가락이 넘는 연을 이어본 적이 없다. 가족은 내게 불가사의한 존재다. 가족의 일원이면서도 내가 또 다른 가지를 치는 건 망설인 끝에 포기하며 살았다.

주목해야 할 감독 앤드루 쾨팅은 장편 데뷔작 <갤리밴트>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어린 딸 이든, 할머니 글래디스와 함께 영국의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기록을 남기기로 한다. 3개월간 지속된 여정 속에 할머니와 소녀는 사정상 간간이 일상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로드무비 100>을 쓴 제이슨 우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아방가르드 여행기와 가족 모험영화의 이종간 결합’이라고 평했는데, <이 지저분한 땅>(2001)이나 <이블>(2009)을 보았다면 전자는 짐작 가능한 부분이다. 슈퍼 8mm와 35mm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은 거친 입자로 넘치고, 푸티지와 다큐멘터리와 허구의 영상이 정신없는 속도로 뒤섞이며, 사운드 또한 독창적이다. 후자에서 언급된 가족은 쾨팅의 작업 전체에 걸쳐 중요한 개념이다. 해안을 따라 형성된 풍경, 마을, 문화, 전통과 그것을 흡수하며 사는 사람들이 <갤리밴트>의 주요한 부분이지만, 영화의 중심에는 쾨팅의 가족이 있다. 여든이 넘은 글래디스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고, 주버트 증후군에 걸려 의사소통이 힘겨운 이든은 마법 같은 몸짓으로 아빠를 기쁘게 한다. 쾨팅은 가족의 훈훈한 정서를 애써 숨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의 유대가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하지도 않는다. 쾨팅은 할머니와 그와 딸이 각자의 길로 떠나기 전에 기회를 잃어버릴까봐 <갤리밴트>를 찍었다고 밝혔다. 당연히 감상적으로 빠질 법한 순간에도 사랑의 힘을 운운하며 눈물의 꼼수를 부리지 않는 게 이 영화의 매력이다. 실제로 가족을 이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단순하게 설명될 수 없으며, 가족 구성원은 각자 사연을 지닌 채 산다. <갤리밴트>가 헌정된 이든의 엄마 레일라 맥밀란이 함께 살지 않는 게 사연의 한 예다. 단정짓기 힘든 복잡한 감정과 행동들, 그것이 가족이란 집단 위로 자리하는 것이며, 그것을 두루 몸으로 체득하고 마음으로 수용하는 자에게 삶은 긴 여정을 드러내 보인다. 사랑만으로 가족의 끈이 지탱된다면, 가족의 유대를 온전히 유지할 가족은 세상에 없다. 사랑으로만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고 믿는 건 몽상가뿐이다. 60년을 싸우고 화해하며 살아온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알려준 뼈아픈 진실이기도 하다.